호주에서 북동쪽으로 1800km 떨어진 섬 솔로몬제도에 가면 보기 드문 장면에 맞닥뜨리게 된다. 피부색은 흑인에 가까운 짙은 갈색인데, 머리카락은 백인처럼 밝은 금발을 하고 있는 원주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금발은 백인만 갖고 있는 것’이라는 편견을 깨는 모습이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금발은 백인들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갈색피부인 솔로몬제도 원주민의 5~10%도 금발을 하고 있다. 그동안 이들에게 나타나는 금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유럽인이나 아메리카인의 유전자가 전달됐다는 가설도 있었고, 햇빛이나 소금물, 생선이 풍부한 식단 때문에 머리카락 색깔이 밝아졌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미국 연구진은 솔로몬제도 원주민의 금발은 특정 유전자의 돌연변이 때문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해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들은 솔로몬제도 사람들이 다른 지역 백인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결과가 유전학 연구에 있어 유럽 중심적인 시각을 벗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스탠포드대 유전학과 신 마이레스(Sean Myles) 교수팀은 솔로몬제도 원주민에서 나타나는 금발 유전자를 찾기 위해 1209명의 침과 머리카락 시료를 조사했다. 보통 특정 지역 인구의 유전자를 연구하는 데는 수천 명 이상의 자료가 필요하지만 금발과 흑발 사이에 명백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번 연구에서는 적은 숫자로도 쉽게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마이레스 교수는 “솔로몬제도 원주민의 금발에는 다양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머리카락 색깔은 금발이거나 그렇지 않은 두 가지 특징만 보인다고 예상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금발 43명과 흑발 42명을 선정해 전체 유전자를 비교했다. 그 결과 두 그룹에 있는 유전자 TYRP1 단백질이 다르다는 걸 찾아냈다. 이 유전자는 색소 염색과 관계된 단백질인데, 이 단백질 코드 중 일부가 C에서 T로 바뀌면 흑발에서 금발로 변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변이가 일어나자 쥐의 털에 있는 멜라닌이 제거돼 금발 쥐가 된 사례도 있다.
금발의 솔로몬 섬주민들은 두 종류의 변화된 유전자를 전달하는데, 금발 유전자는 열성이기 때문에 금발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부모 모두에게 유전자를 물려받아야 한다. 연구자들은 유럽 국가를 포함한 전 세계 52개 941명의 DNA 시료에서는 솔로몬 원주민들과 같은 변이를 찾지 못했다.
솔로몬제도에 사는 개인에게 우연히 금발이 나타났고, 인구가 적은 섬의 특성상 이런 변이가 높은 확률로 후대에 전달됐다는 게 연구팀의 추측이다. 즉 전혀 상관없는 두 인구가 적응 결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 것이고 수렴진화의 대표적 사례라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특히 연구팀은 이번 연구결과가 금발의 기원에 관한 유럽 중심적 사고를 깨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카를로스 부스타만테(Carlos Bustamante) 스탠포드대 유전학과 교수는 “이전에 사람들은 금발이 진화 과정에서 한 번만 나타났다고 생각했지만, 금발은 두 차례 다른 형태로 일어났다”며 “이는 우리가 유럽인의 유전자에 집중하면서 잊고 있었던 다른 유전자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마이레스 교수도 “이번 논문이 더 큰 이슈가 돼 과학자들이 새로운 유전자를 찾는 연구로 이어졌으면 좋겠다”며 “이것은 금발처럼 착색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질병에 관한 연구로까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