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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2년] 키만한 총 잡고 1주일 훈련, 포탄속으로 뛰어든 소년병

淸山에 2012. 6. 21. 05:16

 

 

 

 

 

[6·25전쟁 62년]

키만한 총 잡고 1주일 훈련, 포탄속으로 뛰어든 소년병
대구=최수호 기자
이메일suho@chosun.com

 

 

 

[2573명 戰死 공식 확인]
최후의 전선 낙동강 전투 - 아군 3만명 중 소년병이 1만
"총탄에 몸이 뚫려 죽어가는 동지들을 하나둘 보면서
우린 서서히 군인이 됐고 결국 전선을 지켜냈다"


1950년 11월. 당시 17살이던 박영근(79)씨는 친구 10여명과 함께 대구 육군신병교육대에 입대했다. 6·25전쟁 탓에 고향 서울이 초토화되고 학교도 휴교에 들어가자 나라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약 10일간의 군사훈련을 받은 그는 육군 제2사단 31연대에 배속돼 전투에 투입됐고 어딘지도 모르는 고지의 참호에서 작렬하는 포성과 총성을 들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후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해 12월 중순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펼치며 남으로 밀고 내려왔다. 그의 부대는 후퇴를 거듭하다 퇴로를 차단 당했고 청평·가평지구에서 전멸되다시피 했다.

 

중공군의 포로가 된 그는 하루 한 끼 밀밥 한 덩이로 버티며 끌려다녔다. 강원도 화천발전소 근처 임시포로수용소에서 지낼 무렵 미공군기가 이곳을 폭격해 아수라장으로 만든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고, 산에 쌓인 눈과 풀뿌리를 씹으며 남쪽으로 다시 내려오다 원주에서 아군을 다시 만났다.

 

이후로도 그는 경북 영양지구 일월산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했고 청평·가평 등에서 치열한 중부전선 전투를 치렀다.

 


 
앳된 소년병이 이젠 주름 가득… 6·25 전쟁에 참전했던 앳된 얼굴의 소년병(왼쪽 사진 안의 오른쪽)이 백발 노인(오른쪽 사진)이 됐다. 기관총을 잡던 고사리 손에도 이제는 주름이 가득하다. 왼쪽 사진은 소년병으로 전장에서 나라를 지킨 이봉갑씨가 간직해 온 사진으로 부대 소속 사진 기사가 찍었다. 오른쪽 사진은 이씨가 2005년 6월 23일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투 참전용사 명패석 앞에서 전사한 동료 이름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 /이봉갑씨 제공·이재우 기자

 

 

1954년 9월 이등중사로 예편한 그는 덕수상업고등학교 3학년에 복학했으나 전쟁 당시 겪은 고통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 가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채중석(2012년 사망·78)씨는 함열농업고등학교(전북 익산시) 1학년이던 1952년 3월, 16살의 나이로 제330보충대에 자원입대했다. 제주도 성산포 보충대의 신병훈련과 하사관학교 교육 등을 모두 마친 그는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됐다. 중공군과의 교전은 거의 매일 반복됐으며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3차례나 바뀌었다. 채씨는 1956년 11월 일등중사로 제대했다.

 

북(北)의 남침으로 인한 6·25전쟁 발발 후 북한 인민군은 물밀듯이 남하했고 그해 8월 낙동강 전선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적군에 들어갔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병역의무가 없는 10대 후반의 어린 학생들이 자원입대 등의 방식으로 군에 동원돼 군번을 부여받았다. 총 한방 제대로 쏴보지 못한 이들은 곧장 다부동전투, 영천전투 등 낙동강전선에 투입됐다.

 

자기 키만 한 총을 잡은 소년병들은 적군의 포탄에 몸이 뚫리며 숨지는 친구들을 수차례 목격했다. 어떤 소년병은 고통 때문에 "제발 죽여 달라"고 사정하는 친구를 향해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기기도 했다.

 

6·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 관계자는 "낙동강 전투 당시 우리군 수는 3만여명 정도였는데 이 중 1만여명이 소년병으로 채워졌다"며 "우리는 동지들을 잃어가며 서서히 군인이 됐고 결국 전선을 지켜냈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극한의 상황을 겪은 소년병들은 휴전 후에도 전쟁 공포증 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몇 명의 소년·소녀들이 전쟁에 동원됐고 그 중 몇 명이 전사했는지 등 이들의 행적은 지난 수십년간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그사이 환갑을 훌쩍 넘긴 소년병들은 하나 둘 숨져갔다.

 

이렇게 잊혀져 버린 전사(戰士)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6년 대구에서 6·25참전 소년지원병중앙회가 만들어지면서부터다. 소년병 출신인 박태승(79)·안봉근(2009년 사망·당시 77)씨 등 20여명이 뜻을 모아 소년병들의 실체를 알리기 위한 행동에 들어갔다. 6·25 발발 후 낙동강전선이 형성되면서 소년병들의 입대가 시작됐기 때문에 대구·경북 출신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는 이유로 이들이 먼저 나섰다고 한다.

 

이들은 2008년 정부를 상대로 '소년병의 실체를 인정하라'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는 그해 2월 출범한 국민권익위원회의 1호 과제로 낙점됐다. 1998년부터는 매년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중앙회 박태승 회장은 "어린 나이에 한몸 바쳐 나라를 지킨 우리 소년병들의 명예가 제대로 지켜진다면 더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소년병

6·25 참전 소년병들은 병역의무가 없는 만 18세 미만의 소년들이었지만 정식으로 군번을 부여받고 군에 편성된 정규군이었다. 학생 신분으로 자진해 참전해 군번을 부여받지 못한 비정규군 학도의용군(학도병)과는 달랐다. 소년병은 낙동강 전선이 무너질 위험에 처했던 1950년 여름부터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독]

[6·25전쟁 62년]

현재 생존 소년병 7500명… 상당수는 보상 한푼 못받아
대구=최수호 기자
이메일suho@chosun.com

 

 

18세 미만 2만9603명 참전·2573명 전사, 이제야 공식 확인
올해 79세인 이봉갑씨는 17세이던 1950년 경남 밀양군 삼량진에 살고 있었다. 여름 어느 날 그는 장터에 갔다가 갑작스러운 비상 종소리를 들었다. "청년들 모두 모여라"는 소리에 산불이 난 줄 알고 달려간 그는 난데없이 부산진초등학교로 실려갔다. 그는 소총 분해·조립 등의 간단한 훈련을 받은 뒤 군번을 받고 바로 낙동강 전투에 투입됐다. 소년병이 된 것이다. 연필을 잡아야 할 손에 자기 키만한 총을 들고 포탄과 총알 사이를 뛰어다녔다.

 

당시 낙동강전선을 지킨 3만여명의 군인 중 소년병이 1만여명이었다. 이씨는 평소 "낙동강과 대한민국은 아이들이 지켰다"고 말해 왔다. 지금 그는 3년째 반신불수로 요양 중이다.

 

 
 1950년 대구, 출격하는 국군 기병부대 1950년 대구를 지나 전선으로 향하는 한국군 기병대원들. 이 사진은 6?전쟁 당시‘픽처 포스트’지의 특파원으로 종군했던 영국의 사진가 버트 하디(1913~1995)가 촬영한 것이다. 하디는 UN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시도할 즈음 한국에 도착한 뒤 인천상륙작전과 피란민 대열 등 전쟁의 긴박감과 참상을 사진으로 기록해서 전 세계에 알렸다.

 

 그가 촬영한 사진 11점은 6?전쟁 당시 프랑스 종군기자 4명의 취재기를 엮은‘한국전쟁통신’(눈빛출판사)을 통해 처음으로 국내 공개됐다. /눈빛출판사 제공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많은 소년병이 이씨처럼 황혼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영예를 누려본 일이 없다. 국방부는 지난 수십년간 소년·소녀 현역병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만 18세 미만의 소년·소녀 징집을 금지하는 국제법 위반이 되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6·25 발발 62년이 지난 올해초에야 소년병 규모를 공식 확인했다. 20일 국방부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부터 휴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 7월 27일까지 전쟁에 참전한 소년병 수는 2만9603명이며, 이중 전사자가 2573명이다. 당시 '소녀병'도 467명이었다. 이제 생존한 소년병은 7500명만 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지난 2001년 '참전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6·25 참전유공자 중 만 75세 이상인 사람에게 월 5만원씩을 지급해 왔다. 그나마 소년병들은 이른 나이에 군에 갔기에 수당도 5년 정도 늦게서야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액수가 올라 12만원씩을 받는 것이 전부다.

 

1996년 대구에서 결성된 6·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는 "생존 소년병의 30% 이상이 신청방법 등을 몰라 보상금을 받지 못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6·25전쟁 62년]

"국가유공자 인정을" 16대 국회부터 낸 청원 번번이 좌절
대구=박원수 기자
이메일wspark@chosun.com

 

 

 

2008년 정부, 실체확인 나서… 소녀병도 467명 포함돼

6·25참전 소년병의 실체가 드러나기까지는 6·25참전소년지원병 중앙회(이하 중앙회)의 끈질긴 노력과 청원이 있었다.

소년병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촉구해온 중앙회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에 소년병의 실체를 인정하고 소년병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을 냈다.

 

정부에 낸 청원은 최근 진전을 보기 시작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2008년 6월 '중앙회의 신청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며 소년병의 실체를 확인하는 대책 마련과 함께 적절한 보상 및 예우를 해야 할 것이라고 의결했다.

 

이같은 의결에 따라 국방부도 참전 소년병 수와 전사한 소년병의 정확한 숫자 파악에 나섰다. 국방부는 전 군(軍)에서 6·25 참전자 중 만 18세 미만 병사의 명단을 뽑았다. 그리고 전사자 수 파악 작업을 벌였다.

 

하지만 당시의 병적기록부는 모두 손으로 쓴 것이어서 확인이 쉽지 않았다. 오류도 많아서 병무청의 병적자료와 비교하는 작업도 벌여야 했다. 국방부는 지난해 말 3년여 작업끝에 참전 소년병 수 2만9603명, 전사자 수 2573명이라는 공식 집계를 냈다. 각 군별로는 육군 2만2849명, 해군 2984명, 공군 1197명이었다. 여기에는 여성의 몸으로 참전한 소녀병도 467명이 포함됐다.

 

6·25참전소년지원병 중앙회 윤한수(77) 부회장 겸 사무총장은 "그동안 잊혀진 소년병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관련법이 이번 국회에서만큼은 반드시 통과돼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싸웠던 소년병들의 희생과 고난을 인정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생존 소년병이 현재 7500여명에 불과하고, 이들 대부분이 70대 후반의 고령이어서 합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6·25전쟁 62년]

확인된 소년병만 2001년부터 참전수당 월 5만원
대구=박원수 기자
이메일wspark@chosun.com


 

작년부터 12만원으로 올려줘

6·25 참전 소년병들은 병역의무가 없는 18세 미만 소년들이었다. 소년병의 경우, 자원입대할 경우도 있었지만 징집이나 모병 등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입대한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 국가의 존망이 달린 위급한 상황이어서 관련 법령을 제대로 지킬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국제법적으로는 18세 미만 소년의 징병·참전이 금지되어 있어서 당시 6·25 참전 소년병은 국제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6·25참전소년지원병 중앙회는 우리 정부가 지금까지 소년병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시간을 끈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이번에 소년병의 전체 규모를 파악했다고 해서 소년병 처우 문제까지 해소된 것은 아니다.

정부는 2000년까지 실체가 파악된 소년병에 대해 2001년부터 월 5만원의 참전수당을 지급했다. 2011년부터는 이를 월 12만원으로 올렸다. 이것을 전부로 더 이상의 예우는 없는 실정이다.

 

6·25참전소년지원병 중앙회는 지난 16대 국회에서부터 끊임없이 모든 소년병들에 대한 국가유공자 지정을 청원해 왔다. 그러나 번번이 해당 법안이 폐기돼 지금까지도 소년병 처우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국가유공자로 지정되면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으며, 연금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