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62년]
키만한 총 잡고 1주일 훈련, 포탄속으로 뛰어든 소년병 대구=최수호 기자 이메일suho@chosun.com
[2573명 戰死 공식 확인] 최후의 전선 낙동강 전투 - 아군 3만명 중 소년병이 1만 "총탄에 몸이 뚫려 죽어가는 동지들을 하나둘 보면서 우린 서서히 군인이 됐고 결국 전선을 지켜냈다"
1950년 11월. 당시 17살이던 박영근(79)씨는 친구 10여명과 함께 대구 육군신병교육대에 입대했다. 6·25전쟁 탓에 고향 서울이 초토화되고 학교도 휴교에 들어가자 나라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약 10일간의 군사훈련을 받은 그는 육군 제2사단 31연대에 배속돼 전투에 투입됐고 어딘지도 모르는 고지의 참호에서 작렬하는 포성과 총성을 들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후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해 12월 중순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펼치며 남으로 밀고 내려왔다. 그의 부대는 후퇴를 거듭하다 퇴로를 차단 당했고 청평·가평지구에서 전멸되다시피 했다.
중공군의 포로가 된 그는 하루 한 끼 밀밥 한 덩이로 버티며 끌려다녔다. 강원도 화천발전소 근처 임시포로수용소에서 지낼 무렵 미공군기가 이곳을 폭격해 아수라장으로 만든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고, 산에 쌓인 눈과 풀뿌리를 씹으며 남쪽으로 다시 내려오다 원주에서 아군을 다시 만났다.
이후로도 그는 경북 영양지구 일월산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했고 청평·가평 등에서 치열한 중부전선 전투를 치렀다.
앳된 소년병이 이젠 주름 가득… 6·25 전쟁에 참전했던 앳된 얼굴의 소년병(왼쪽 사진 안의 오른쪽)이 백발 노인(오른쪽 사진)이 됐다. 기관총을 잡던 고사리 손에도 이제는 주름이 가득하다. 왼쪽 사진은 소년병으로 전장에서 나라를 지킨 이봉갑씨가 간직해 온 사진으로 부대 소속 사진 기사가 찍었다. 오른쪽 사진은 이씨가 2005년 6월 23일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투 참전용사 명패석 앞에서 전사한 동료 이름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 /이봉갑씨 제공·이재우 기자
1954년 9월 이등중사로 예편한 그는 덕수상업고등학교 3학년에 복학했으나 전쟁 당시 겪은 고통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 가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채중석(2012년 사망·78)씨는 함열농업고등학교(전북 익산시) 1학년이던 1952년 3월, 16살의 나이로 제330보충대에 자원입대했다. 제주도 성산포 보충대의 신병훈련과 하사관학교 교육 등을 모두 마친 그는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됐다. 중공군과의 교전은 거의 매일 반복됐으며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3차례나 바뀌었다. 채씨는 1956년 11월 일등중사로 제대했다.
북(北)의 남침으로 인한 6·25전쟁 발발 후 북한 인민군은 물밀듯이 남하했고 그해 8월 낙동강 전선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적군에 들어갔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병역의무가 없는 10대 후반의 어린 학생들이 자원입대 등의 방식으로 군에 동원돼 군번을 부여받았다. 총 한방 제대로 쏴보지 못한 이들은 곧장 다부동전투, 영천전투 등 낙동강전선에 투입됐다.
자기 키만 한 총을 잡은 소년병들은 적군의 포탄에 몸이 뚫리며 숨지는 친구들을 수차례 목격했다. 어떤 소년병은 고통 때문에 "제발 죽여 달라"고 사정하는 친구를 향해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기기도 했다.
6·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 관계자는 "낙동강 전투 당시 우리군 수는 3만여명 정도였는데 이 중 1만여명이 소년병으로 채워졌다"며 "우리는 동지들을 잃어가며 서서히 군인이 됐고 결국 전선을 지켜냈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극한의 상황을 겪은 소년병들은 휴전 후에도 전쟁 공포증 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몇 명의 소년·소녀들이 전쟁에 동원됐고 그 중 몇 명이 전사했는지 등 이들의 행적은 지난 수십년간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그사이 환갑을 훌쩍 넘긴 소년병들은 하나 둘 숨져갔다.
이렇게 잊혀져 버린 전사(戰士)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6년 대구에서 6·25참전 소년지원병중앙회가 만들어지면서부터다. 소년병 출신인 박태승(79)·안봉근(2009년 사망·당시 77)씨 등 20여명이 뜻을 모아 소년병들의 실체를 알리기 위한 행동에 들어갔다. 6·25 발발 후 낙동강전선이 형성되면서 소년병들의 입대가 시작됐기 때문에 대구·경북 출신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는 이유로 이들이 먼저 나섰다고 한다.
이들은 2008년 정부를 상대로 '소년병의 실체를 인정하라'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는 그해 2월 출범한 국민권익위원회의 1호 과제로 낙점됐다. 1998년부터는 매년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중앙회 박태승 회장은 "어린 나이에 한몸 바쳐 나라를 지킨 우리 소년병들의 명예가 제대로 지켜진다면 더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소년병
6·25 참전 소년병들은 병역의무가 없는 만 18세 미만의 소년들이었지만 정식으로 군번을 부여받고 군에 편성된 정규군이었다. 학생 신분으로 자진해 참전해 군번을 부여받지 못한 비정규군 학도의용군(학도병)과는 달랐다. 소년병은 낙동강 전선이 무너질 위험에 처했던 1950년 여름부터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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