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작곡가 / 피아니스트·지휘자. 세모노보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페테르부르크음악원을 거쳐서 모스크바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18세 때 피아노과, 19세 때 작곡과를 졸업했습니다.
그 무렵 작곡한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C단조》로 이름을 떨쳤으며,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도 전개했는데, 자신이 초연(初演)한 《피아노협주곡 제 2 번 C단조(작품 18, 1901)》로 글린카상을 받고 명성을 확립했습니다.
1904년부터 2년간 볼쇼이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자작 오페라《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를 초연했습니다(1906). 1906년 드레스덴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작곡한《교향곡 제 2 번 E단조(작품 27, 1907)》로 두번째 글린카상을 받았습니다.
1909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까지 피아니스트로서 활약했으며, 《피아노협주곡 제 3 번 D단조》를 미국에서 초연했습니다(1909). 귀국 후 17년까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나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조국을 탈출, 18년부터 미국에 정착하여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계속했으며, 캘리포니아주 비벌리힐스에서 죽었습니다. 이 동안의 작품으로 《피아노협주곡 제 4 번 G단조(작품 40, 1928)》,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1934)등이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은 P.I. 차이코프스키등 19세기 음악에 규범을 요구한 낭만적 색채로 시종일관되어 있어 새로움이나 심도가 부족하다고 하나,
정서적인 선율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3 in D minor, Op.30
1909년 라흐마니노프는 처음 미국을 여행했는데, 프로그램에는 신작 피아노 협주곡 3번이 포함되었었습니다. 그 작품은 그의 완전히 성숙한 멜로디 스타일, 풍부하면서도 변화무쌍하고 식견을 갖춘 오케스트라의 사용법, 그리고 큰 스케일의 구조에 대한 대단한 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연은 발터 담로쉬의 지위로 11월 28일 뉴욕의 뉴 시어터에서 있었습니다.
1910년 1월 그는 다시 카네기 홀에서 연주했으며, 이번에는 말러의 지휘아래 뉴욕 필하모닉이 협연했습니다. 아름답고 향수를 느끼에 하는 1악장 첫 주제는 너무나 명백히 러시아적이어서 라흐마니노프가 전용한 실재 민요같이 느껴집니다. "만약 이 주제는 작곡하는 데 있어 어떤 계획이 있었다면, 나는 오직 소리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가수가 멜로디를 노래하듯 피아노로 멜로디를 노래하고 싶었다." 그 주체는 인상적인 응집력과 미묘한 주제의 절충 관계, 넓고 풍부하게 변화하면서 카덴차에서 절정에 이르는 구성을 가진 작품으로 발전하였습니다. 2악장은 러시아의 동양적 특징을 나타내는 풍부한 음색이 나타나며, 특히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향취가 물씬 풍깁니다. 여기에는 평화스런 고요함이 있지만, 거의 끝부분에 환상이 대조되는 순간 악장의 주제가 왈츠의 형태로 다시 나타납니다.
같은 주제는 언터메초 뒤에 중단없이 연주되는 화려한 종악장에서 다시 들립니다. 음악은 흥분되고 극적인 카덴차과 코다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는데, 끝분에서 피날레의 2주제가 너무나 광대하고 정려하게 울려 1주제에서 나타났던 고통과 그리움을 말끔히 잊게 합니다. 이 3번 협주곡은 거의 작곡가의 2번 만큼이나 유명해졌으며, 많은 이들이 라흐마니노프의 문학에 대한 기여이고 그래서 더욱 아끼고 있습니다.
이 협주곡은 1909년 그가 모스크바의 러시아 음악 협회 부회장 겸 교향악 연주회의 지휘자로 활약하고 있을 무렵에 이를 완성한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작품은 미국을 위해 작곡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 그는 이 작품의 완성을 서둘러 뉴욕에서 초연하려고 마음먹고 1909년 가을에 미국으로 가서 그 해 1월 28일에 뉴욕에서 자신의 피아노 독주로 초연하였습니다. 한편, 이곡은 그의 4개의 협주곡 중에서 내용이 가장 충실하고 작곡 기교에 완벽을 기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곡은 요제프 호프만에게 바쳐졌습니다.
1 Allegro ma non tanto
2 intermezzo (Adagio)
3 Finale (Alla bre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