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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개혁 외면한 경제 중시 鄧 노선 … 한계 봉착?

淸山에 2012. 6. 3. 22:05

 

 

 

 

 

정치개혁 외면한 경제 중시 鄧 노선 … 한계 봉착?
[중앙선데이]

 

 


천안문 사태 23주년, 흔들리는 덩샤오핑의 권위

 

 


개혁·개방을 시작할 무렵의 덩샤오핑이 해방군 행사에 참석해 박수를 치고 있다.

[중앙포토]


1949년 11월 중국 공산당의 2야전군 병력은 서남쪽을 향해 진군한다. 충칭(重慶) 등에서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부대를 치기 위해서다. 사령관은 류보청(劉伯承), 전략적 판단을 내리는 정치위원은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덩은 이미 베이징(北京)에 입성한 당 중앙의 마오쩌둥(毛澤東)에게 급전을 쳤다. “최종 공격을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회신은 “기다리자”였다. 의외의 답신이었다. 그러나 덩은 굽히지 않았다. 다시 전보를 쳐서 “지금이야말로 최후 일격을 가할 시기”라고 주장했다.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덩샤오핑과 류보청의 부대는 충칭을 함락시켰고, 장제스와 국민당 세력은 대만으로 쫓겨났다.

 

중국계 미국 학자로 중국 정치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벤저민 양의 덩샤오핑 평전(민음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중국 건국의 최고 히어로 마오쩌둥과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전략적 안목을 비교할 때 등장하는 일화다. 마오쩌둥은 국민당이 대만 또는 다른 지역으로 도주해 자칫 분단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내다봤고, 덩샤오핑은 제 앞에 다가온 상황의 유리함을 놓치지 않겠다는 집요한 현실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전문가들 중에는 앞을 내다보는 전략적 깊이에서 마오쩌둥이 덩샤오핑에 비해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고담준론보다는 실리에 입각해 현실을 냉정하게 저울질하는 점에서는 덩샤오핑이 마오에 비해 한 수 위라는 평가도 있다. 그런 덩샤오핑의 단점을 이야기할 때는 ‘급공근리(急功近利)’라는 말이 나온다. 지나치게 실리에 기울어져 먼 곳의 목표를 놓칠 수 있다는 지적을 담은 성어다.

 

과거 30여 년 동안 중국이 걸어온 길의 기초를 닦은 이는 덩샤오핑이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수식이 그에게 따라붙는 이유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미증유의 중국식 실험은 대단히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따라서 덩은 오늘날 중국이 거둔 기적과 같은 발전의 최고 수훈자다.

 

그러나 그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요즘 슬슬 나온다. 특히 1989년 6월 4일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진 시위의 유혈 진압을 기념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더 그렇다. 200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낳았던 89년 6·4 천안문 사태 당시 베이징 시장을 역임하면서 유혈진압을 주장했다고 알려졌던 천시퉁(陳希同)은 최근 언론을 통해 “나는 그에 간여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유혈진압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지 않다는 그의 주장은 ‘종국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은 덩샤오핑’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는 평가다.

 

그의 회고록이 곧 중국 밖에서 발매될 예정이다. 이를 기점으로 덩샤오핑의 공과가 본격적으로 심판대에 오를지 관심거리다. 30여 년 동안 흔들림 없는 중국 국가발전의 지침으로 작용했던 덩샤오핑의 사상과 이론이 흔들릴 조짐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그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현실적인 노선 덕분에 중국은 이제 미국과 힘을 겨루는 G2의 강대국으로 올라섰다. 경제와 국방력, 과학기술력 등에서 미국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내부적인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특히 정치적 자유화의 지체가 길게 이어지면서 생기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더구나 초고속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빈부격차 문제는 전혀 줄어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베이징 톈쩌(天則)경제연구소의 유명 학자인 장수광(張曙光)은 그런 중국의 문제를 “관료는 죄책감이 없고, 국민은 노예의 근성만 키운다(官無罪感, 民有奴性)”는 말로 압축해 표현하고 있다. 관료부패의 문제는 더 심해지고 있다. 중국 건국 뒤 60여 년이 흐르면서 경제범죄에 연루돼 당의 처분을 받은 관료는 250만 명, 법의 제재를 받은 이는 40만 명에 달한다. 마오쩌둥 시절에 관료 부패가 매우 적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부분은 개혁·개방 뒤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2007년 공산당 당기율위원회에 경제범죄로 걸린 관료는 16만 명이다. 그러나 “잡힌 부패 관료는 전체의 3%에도 못 미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금액도 급격히 커지는 추세다. 2007년 부패 관료의 평균 수뢰 액수는 253만 위안(약 4억4000만원)이었으나, 2008년에는 884만 위안(약 14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부패의 정도가 매우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여주는 수치다.

 

덩샤오핑의 이름 ‘샤오핑’은 ‘작은 병’을 뜻하는 ‘샤오핑(小甁)’의 발음과 같다. 이 작은 병을 줄에 달아 끌고 다니는 실직자들이 늘어났다는 얘기가 한동안 중국 내에서 돌았다. 줄에 병을 매달고 질질 끌며 걸어가던 사람들은 공원 벤치에 앉아 나무 막대기를 찾아 이 병에 매질을 가했다고 한다. 생계가 막막해진 빈곤계층의 화풀이가 작은 병, 즉 덩샤오핑을 향해 터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얘기다.

 

‘덩샤오핑의 오류’를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지식인은 중국 내에 거의 없다. 그가 남긴 체제의 계승자들이 ‘덩샤오핑의 이론’을 공산당 당장(黨章: 당헌에 해당)에 올려놓고 중국 국가발전의 금과옥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회적으로 덩의 과오를 말하려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는 추세다.

 

덩샤오핑에 의해 축출된 정치개혁의 주창자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을 향한 추모 열기가 해를 거듭하면서 강해지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두 사람은 개혁·개방의 선두에 섰던 덩샤오핑의 과거 심복이다. 그러나 그 둘은 6·4 천안문 사태를 전후해 정치개혁을 실천에 옮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모두 공산당 총서기라는 명문상 중국 최고의 권력에 올랐으나 권력 2선에서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던 덩샤오핑의 ‘정치개혁보다는 경제발전이 우선’이라는 논리에 밀려 결국 당내 비판에 시달리다 사망(후야오방)하거나, 오랜 자택연금 상태에 놓였다가 죽었다(자오쯔양).

 

89년 4월 사망한 후야오방의 기일에는 그의 묘역이 있는 장시(江西)성의 공산주의청년단 본부에 화환이 끊임없이 올라오면서 추모 열기가 이어졌고, 2005년 1월 사망한 자오쯔양의 올해 기일 직전에는 그를 추모하는 네티즌의 글들이 폭주하는 현상도 빚어졌다.

 

전 충칭시 당서기 보시라이(薄熙來)는 그런 국내의 불만을 등에 업고 포퓰리즘 성격이 강한 정책 드라이브를 선보였으나 자신이 범한 깊은 부패와 부정의 늪에 걸려 낙마하고 말았다. 중국 정치권에서도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중심으로 “정치개혁이 이제 중국의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차기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를 것으로 보이는 왕양(汪洋) 광둥성 당서기 등도 여러 차례에 걸쳐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대세를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다. 올해 말 공산당 총서기에 오를 시진핑(習近平) 등 차세대 지도부는 정치개혁을 어떤 형태로든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관료 부패와 빈부격차 등으로 쌓인 국내의 불만을 해소하는 길은 정치적 자유화와 실질적인 법치(法治), 관료 감독체제의 확립이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의 오류’에 관한 시비가 어떻게 번질지 관심을 끌고 있다. 

 

 

유광종 기자 kjy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