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먹여 살릴 과학자] 포스텍 찰스 서 교수
이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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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세포 비밀 풀어 자가면역질환 정복"
세균·바이러스와 싸우는 몸속 정규균 T세포 권위자
관절염 등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2016년 65조시장으로 급성장
신약 개발 돌파구 마련 기대
소년은 병약했다. 편도선이 부어 신열을 앓기 일쑤였고 감기를 달고 살았다. 그럴 때마다 '사람은 왜 아픈 걸까', '병이 걸리면 몸속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물음에 사로잡혔다. 11세 때 부모님을 따라 고향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던 소년은 이제 세계적 면역학자로 성장해 귀향했다. 지난 5월 7일 기초과학연구원이 발표한 10명의 연구단장에 선정된 찰스 서(Charles Surh·한국명 서동철·51) 포스텍 교수(융합생명공학)의 이야기다.
그는 어려서부터 의사가 꿈이었다. 의학대학원을 준비하려 진학했던 UC샌디에이고 화학과 2학년 때 그는 의사보다 재미있는 일을 발견했다. 인체 면역을 연구하는 대학원의 한 실험실에서 일을 돕다가 면역세포, 특히 우리 몸속의 '정규군'인 T세포에 매혹된 것이다.
찰스 서 포스텍 교수가 실험용 생쥐에 형질 변형된 면역세포를 주사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머리 깎을 시간까지 아끼느라 대학원생 시절부터 짧은 스포츠형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kangho@chosun.com
인체는 세균·바이러스·곰팡이 등 이물질이 침입하면 혈액 속 대식(大食)세포가 먼저 전투를 벌인다. 여기서 패배하면 나서는 것이 T세포다. T세포는 6시간마다 분열, 4~7일간 병력을 1만배로 증강해 적을 궤멸한다. 임무를 완수한 T세포는 대부분 사멸하고 소수만이 적군의 특징을 기억한 채 살아남는다. "어릴 적부터 궁금했던 인체의 신비가 T세포 안에 담겨 있었죠."
면역학으로 진로를 바꾼 그는 UC데이비스에서 박사가 됐다. 박사 과정을 밟으며 10여편의 주목할 만한 논문을 써냈고 덕분에 스크립스(Scripps)연구소에 입성할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 라호야 해안의 절경 속에 있는 스크립스는 세계 최대의 비영리·민간 생명공학연구소. 노벨상 수상자 4명을 배출했고 그중 면역학 분야에서 브루스 보이틀러(55) 박사 등 2명의 수상자를 내 '세계 면역학의 성지'로 통하는 곳이다.
서 교수는 이곳에서 T세포의 탄생·성장·소멸에 이르는 전 과정을 규명하는 논문을 네이처·사이언스 등 최고의 과학 저널에 잇달아 발표했다. 그는 흉선(胸腺·심장 위쪽에 있는 작은 장기)에서 만들어진 T세포 중 99%가 죽고 단 1%만이 살아남아 전선에 투입된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2008년 그는 스크립스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인 정교수가 됐다.
서 교수는 올해 초 한국의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장 모집에 응모해 최근 선정됐다. "한 해 100억원의 연구비, 우수한 학생과 실험 장비들은 어떤 연구도 가능케 하는 훌륭한 조건이에요." 연구단장에 선정된 뒤 1996년 세포 면역 연구로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던 피터 도허티(호주 멜버른대) 교수가 그를 추천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23년간 몸담았던 스크립스를 떠나 포항에 자리 잡은 그가 택한 새 화두는 '자가면역질환'. 면역세포가 체내의 정상 세포를 공격하는 병이다. 서 교수는 "과거 인간 질병의 대부분은 세균·바이러스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감염성 질환은 백신의 발달로 더 이상 인류를 위협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인류는 이제 외부 병원(病原)과 무관한 류머티즘 관절염, 1형 당뇨병, 루푸스, 다발성 경화증 같은 전혀 다른 차원의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글로벌 리서치 회사인 BCC리서치는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시장이 급성장해 2016년 550억달러(약 65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몸속의 '공생(公生)세균'에 주목한다. T세포와 공존하는 이 세균들이 어떤 조건에서 T세포로 하여금 우리 몸을 공격하게 유발한다는 가설이다. "T세포와 세균들 간 평화 공존을 깨는 원인을 찾아낸다면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할 혁신적인 약물을 분명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T세포
몸속에 들어온 외부 침입 물질을 파괴하거나 그에 맞설 항체를 만드는 다른 면역세포를 조절하는 면역세포. 그 기능이 고장 나면 인체의 정상 세포를 공격해 자가면역질환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