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이 붉게 타오르는 건 당신처럼 울어서 일 것이요!
秋史 김정희 애틋한 부부애, 그 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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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하지 못한 인연이 안타까워서일까. 아내의 죽음도 모른 채 바다 건너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서 조강지처의 건강을 염려하는 편지를 쓰던 기막힌 신세가 한탄스러워서일까. 제주도의 탱자나무 울타리에 갇혀 피눈물을 쏟던 추사 김정희가 한 줌 흙이 돼 예산의 사과 향기 그윽한 생가 옆에서 아내와 함께 못다 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 하자던 약속의 상징이라도 되듯 추사가 심은 백송 한 그루가 푸른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어떻게 월로를 불러 저승에 호소하여(那將月老訟冥司)/ 내세에는 그대와 내 자리 바꾸어 태어날까(來世夫妻易地爲)/ 나는 죽고 그대는 천 리 밖에 살아서(我死君生千里外)/ 그대로 하여금 이 슬픔을 알게 했으면(使君知我此心悲)’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제주도의 대정현에 유배된 지 3년 되던 해에 부인 예안 이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다. 수십 통의 한글편지를 보내 병약한 지어미를 걱정하던 57세의 지아비는 결국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도망시(悼亡詩)를 지어 슬픔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추사체와 세한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추사가 어린 시절을 보낸 추사고택은 증조부인 김한신이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대갓집.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기품을 잃지 않은 단아한 모습이 추사의 성품을 닮았다고 할까.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사랑채가 나그네를 맞는다. 현판과 주련(기둥이나 벽에 장식 삼아 써 붙이는 글씨) 등 추사의 글로 단장한 사랑채 앞마당의 돌기둥은 해시계의 받침대. 돌기둥에 새겨진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추사의 아들이 추사체로 쓴 글을 각자(刻字)했다.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매화나무와 앵두나무 등이 고택의 운치를 더한다.
추사는 15세 때 동갑내기인 한산 이씨와 결혼했지만 안타깝게도 5년 후 상처한다. 그리고 23세 때 예안 이씨와 재혼한다. 하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추사는 양자를 들여 ‘육십이 돼서야 부모 소리를 들었다’고 기뻐했다. 두 번에 걸친 10년의 귀양생활과 아내의 죽음으로 말년을 쓸쓸하게 보낸 추사에게 단란한 가족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추사고택 안채 기둥에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大烹豆腐瓜薑菜)/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의 모임이다(高會夫妻兒女孫)’라는 주련이 걸려있는 것도 추사의 가정이 쓸쓸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을 한다’는 속담은 추사를 두고 한 말이나 다름없다. 추사의 처가는 추사고택에서 20여㎞ 떨어진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의 건재고택. 우리나라 전통정원 10선에 뽑힐 정도로 정원이 아름다운 건재고택은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으로 불리는 외암민속마을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지금은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들어갈 수 없지만 사랑채 안채 문간채 등으로 이루어진 건재고택의 기둥에는 주련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오늘 집에서 보낸 서신과 선물을 받았소. 당신이 봄밤 내내 바느질했을 시원한 여름옷은 겨울에야 도착을 했고 나는 당신의 마음을 걸치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 머리맡에 병풍처럼 둘러놓았소. 당신이 먹지 않고 어렵게 구했을 귀한 반찬들은 곰팡이가 슬고 슬어 당신의 고운 이마를 떠올리게 하였소. 내 마음은 썩지 않는 당신 정성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워 집 앞 붉은 동백아래 거름되라고 묻어주었소. 동백이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 눈자위처럼 많이 울어서 일 것이오.’
제주도 유배 시절에 추사가 아내에게 보낸 한글 편지의 일부다. 금실이 좋았던 추사는 때로는 편지로 반찬 투정을 하기도 하고 병약한 아내에게 약을 챙겨 먹으라고 하는 등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다. 천하의 명필이지만 추사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는 알아보기 쉽도록 일부러 한글로 써 보냈다고 한다.
추사 가문의 부부사랑은 대를 이어 내려오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추사고택을 건립한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의 남편. 김한신이 38세로 요절하자 화순옹주는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 남편을 따라 죽었다. 조선시대 왕족으로서 유일하게 열녀문을 받은 화순옹주는 추사고택 인근의 구릉에 남편과 합장돼 못다 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
64세에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66세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됐다가 1년 만에 풀려난다. 그리고 한성판윤을 지낸 부친이 경기도 과천에 마련한 과지초당에서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우다 71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아카시아 향기 그윽한 옥녀봉 아래에 위치한 과지초당은 추사박물관 건축공사로 자물쇠가 채워진 채 재개장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추사는 살아서 못다 한 부부의 인연을 죽어서 완성했다. 추사고택 옆에 위치한 추사의 무덤은 첫 번째 부인인 한산 이씨와 두 번째 부인인 예안 이씨의 합장묘. 추사의 지극한 부부애를 과시라도 하듯 후손들이 1937년 한산 이씨 묘에 추사와 예안 이씨의 묘를 이장해 합장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추사가 고조부 묘소 앞에 심은 수령 200년의 백송(白松)이 추사와 추사의 두 아내를 상징한다는 것. 청나라 연경에 사신으로 파견된 생부를 따라 갔다가 구해온 백송은 본래 가지가 3개였으나 먼저 간 아내처럼 두 가지는 고사하고 하나만 살아남아 푸른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예산·아산·과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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