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겨을이 오기 전에 승리를 거두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러시아 사람들은 모스크바 시를 불태워 버렸으므로
나폴레옹 군대는 굶주림과 추위와 기병대에 쫓기어 마침내
패잔병 3만명이 간신히 파리로 물러나는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
이에 러시아는 그 같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모스크바에 큰 교회를 세웠는데,
"차이코프스키"는 이 축전을 기념하기 위해「1812년」서곡을 작곡하였다.
이 작품은 러시아군이 나폴레옹 군대를 쳐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쓴 것이다.
이 작품이 초연되었을 때 교회의 광장에는 대 편성의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었는대,도중에 북이 나오는 곳에서 포병대의
축포를 쏘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마치 표재음악과 같은 맛이 나는 장엄한 서곡인대, 여기에는 프랑스의
국가와 크레믈린을 암시하는징소리 등이 교묘하게 사용되고 있다.
나폴래옹 군대를 상징하는 프랑스의 국가 "마르세유의 노래"가 단편적으로
나타나며 러시아 국민의 명랑한 기분을 암시하는 민요풍의
무곡의 멜로디 등이 나타난다.
마지막에 러시아의 국가에 뒤섞여 축하의 종 소리가 울려 나오는
비할 데 없는 승리의 기쁨을 표현한 음악이다.
-명곡해설 중에서-
_1812년 서곡_
차이코프스키의 유명한 <1812년> 서곡은 그가 원치않는 결혼과 파경을
맞이한 후 3년이 지난 1880년에 작곡되었다.
이 시기는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작곡한 후이며 <이태리 기상곡>과
<현을 위한 세레나데>를 작곡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1880년 모스크바 박람회를 맞이하여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부탁으로
작곡을 시작한 차이코프스키는 루빈스타인에게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작곡을 시작했다"고 말할 정도로
내키지 않아 했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전혀 유쾌하지 않은 것을 찬양하기 위한 음악을
반감없이 시작하기란 불가능하다.
항상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내가 전혀 좋아하지 않는
교회를 위하여 작곡을 하는데 무슨 영감이 일어나겠는가."
(David Brown 저,Tchaikovsky, Vol.Ⅲ: 방황의 세월 1878-85에서 인용).
차이코프스키 자신의 이러한 작품에 대한 싫음은
그 자신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폰 메크 부인에게 그 서곡은 매우 크고 시끄러우며 아무
애정도 없이 작곡되었기 때문에 예술적 가치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청중들 기호의 척도인 레코드가 60여종이나 출반되었고,
연주회장에서도 1812년 서곡이 자주 연주된다는 사실은 차이코프스키
자신의 감정의 음악애호가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1812년 서곡>은 차이코프스키의 가장 사랑받는 작품의 하나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