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화폭의 예술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사상과 그림

淸山에 2012. 4. 23. 12:59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사상과 그림
 
 
 
 
▷ <공재 자화상>◁
 
  공재 윤두서 ( 恭齋 尹斗緖 ; 1668, 顯宗9 ~ 1715, 肅宗41 )
 
 
 
 -공재의 가문과 사상
 공재는 호남의 대부호이자 명문가의 출신이었다. 1760년 당시 노비 500여 명에 논밭이 2,400 마지기에 달하였다고 할 정도로 지방의 유지이자 토호로서 부를 누렸다.
 
 그의 증조부는 고산 윤선도( 孤山 尹善道 ; 1587~1671 )였으며 첫째 부인의 가문은 전주 李씨 지봉 이수광( 芝峰 李睟光 ; 1563~1628 )의 증손녀였다.
 
 친구로는 옥동 이서( 玉洞 李溆 ; 1662~1723)와 그의 동생 성호 이익( 星湖 李瀷 ;1681~1763)등이 있었으며 외증손으로 다산 정약용( 茶山 丁若鏞 ; 1762~1836)등의 후손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 공재의 사상은 골수 남인(南人)에 실학사상(實學思想)의 한 중심 축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실예로 공재의 아들이 쓴 <공재 윤두서 행장>에 의하면 공재의 "실득(實得)" 즉 '실사(實事)'를 기술한 부분이 전하는데 공재는 제가(諸家)의 뭇 기술인 병법, 천문, 패관소설, 지리서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직접 그린 <동국여지지도>와 <일본여지도>가 전한다.
 
 
 
 < 공재의 동국여지지도와 서문>
 
 그의 이러한 "실득(實得)"의 실학사상은 반계(磻溪 柳馨遠; 1622~1673)와 지봉에서 성호와 다산으로 이어지는 훌륭한 가교가 된다고 하겠다.
 
 공재는 남인으로서 많은 박해의 시기에 살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기의 30~40대를 집안의 초상과 친지들의 옥사등 연이은 불행의 시대를 지내다가 서울 종현( 鐘峴;지금의 보신각 근처 )에서 낙향한 3년 후 48세로 인생을 마감한다.
 
 
- 공재의 그림
 공재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속화(俗畵)'라는 "realism"을 개척하는데 앞장을 선 인물이다.
 
 "남종문인화"는 명말(明末) 중국 소주(蘇州) 화단의 '오파(吳派)'가 중심이 되어 '절파(浙派)'와는 다른 맥락으로 그림을 해석하고 그림을 그린 ▷심주(沈周; 개창한 인물), 문징명(文徵明), 구영(仇英), 당인(唐寅)◁등이 일으킨 회화 운동으로 공재는 <당시화보(唐詩畵譜)>와 <고씨화보>등의 '오파'의 화보집을 통하여 아무런 사승관계 없이 그림에 입문하여 '오파'의 'realism'을 계승, 발전시킨다. 
 
 공재의 그림에는 말그림이나 인물화가 산수화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고, 작은 화첩의 소품을 즐겨 그림으로써 '실학자'이면서 '속화가(俗畵家)'인 자신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나물 케기>, <목기 깍기>, <짚신 삼기>, <휴식>등에서 이전에는 변방에 서있던 "서민(庶民)"이 당당히 선비나 신선의 자리에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기마도>
 
 
                                                                               
<낙마도>
 
 
 <최고의 명작으로 불리우는 "노승도">
 
 
 <해남 가첩에 있는 그림>
 
 
 아울러 공재는 글씨로서도 일가를 이룬다. 
 '남종화'의 정신인 "시.서.화 일체(詩.書.畵 一切)"를 온전히계승한 것이다.
 
 옥동과 공재가 추구하였던 "동국진체(東國眞體)"는 이후▷ 백하 윤순(白下 尹淳)과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에 의하여 완성되어진다.
 
 영조(英祖)대 '문예부흥의 기틀'에는 공재(恭齋)가 있었다.
 
 
 


 
 
그림이 나를 쏘아본다… "이 자리서 결판내자"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7]
손철주 미술평론가


‘윤두서 자화상’… 종이에 담채, 38.5×20.5㎝, 18세기, 개인 소장.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 1715)'라고 하면 긴가민가하다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도 이 그림을 들이밀면 "아, 그 사람" 한다. 공재는 얼굴이 명함이다.
 
실은 얼굴값만 한 게 아니라 집안도 만만찮다. 증조부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은 윤선도이고, 외증손이 실학자 정약용이다. 호에 '재(齋)' 자가 들어가는 조선의 대표화가
세 사람, 곧 '삼재(三齋)' 중 한 명이 윤두서다. 말[馬]그림은 그가 조선에서 으뜸이다.
 
그가 그린 이 자화상은 국보 제240호이다. 크기는 가로 세로 한두 뼘밖에 안 되지만, 거기에 담긴 힘이 대단하다. 그의 눈은 보는 이를 쏘아보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결판내자는
심산이다. 눈길을 피해도 잔상이 남는, 지독히 강한 눈빛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동공과 홍채가 잡티 없이 또렷하다. 눈언저리에는 마치 달무리 진 듯 둥근 자국을 그렸다. 가운데 눈망울이 더 도드라지고 올라간 눈초리가 더 날카롭게 보이는 효과를 준다.
 
거꾸로 쓰거나 바로 쓴 여덟 팔(八)자 모양의 눈썹과 콧수염도 은근히 대비된다.
극적인 요소가 더 있다. 머리에 쓴 탕건을 과감히 트리밍하는 바람에 한눈팔 겨를 없이 얼굴을 보게 된다. 그 얼굴이 불쑥 튀어나온 것은 구레나룻이 뒤쪽으로 말려들어갔기 때문이다. 정성 들여 그린 수염이 압권이다. 뭉친 곳이 없고 한 올 한 올 따로 논다.
 
공재가 실제로 자기 수염을 세어본 뒤에 그렸을 법한 믿음을 준다. 그의 꼼꼼한 묘사력은 콧속의 잔털까지 잡았다.
 
처음에는 옷도, 귀도 다 그려진 상태였지만 세월이 가면서 닳아버렸다. 그래서 얼굴만
허공에 붕 떠있는데, 그게 묘한 아우라를 빚는다. 공재의 됨됨이가 궁금하면
그의 자화상을 보라.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실존이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