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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美는 전혀 없는 '문화주택'이 처녀 꾀는 수단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59)

淸山에 2011. 9. 7. 15:11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59)

 

朝鮮美는 전혀 없는 '문화주택'이 처녀 꾀는 수단

 

1935년 10월 경성 시내 재동(齋洞)에 거주하는 23세 여자가 시내 관훈동 청년 민모씨를 상대로 경성 지방법원에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 일만원(약 2억원) 청구 소송을 낸 사건이 조선일보에 대서특필됐다. 이 여자가 원래 정혼한 남자조차 버리고 민모씨에게 모든 걸 바친 이유는 집 한 채 때문이었다. 잡지사 기자이던 이 미모의 여성은 우연히 만난 이 남자가 시내 청엽정(靑葉町·용산구 청파동)에 있는 '문화주택'에 사는 것을 보고 그날로 동거를 시작했는데 그 집이 실상 셋집으로 밝혀져 소송을 낸 것이다. 기사엔 '도괴(倒壞)된 문화주택 결혼'이라는 제목이 붙었다.(1935년 10월 25일자)

1930년을 전후해 급증한 '문화주택'은 당대에 첫손 꼽히는 부(富)의 상징이었다. 사전적으론 그저 살기 좋게 개량하여 꾸민 신식 주택일 뿐이지만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 때던 한옥의 모든 불편함은 없애고 홀(거실)과 욕실의 편안함을 보탠 꿈의 집이었다. '문화주택'을 처음 들여다본 어느 문화계 인사는 "대체로 조선미(朝鮮美)는 조금도 차질수 업는 집이다. 장독대도 볼 수가 업다. 아모리 보아도 외국인의 가정을 방문한 감이 있다"(1930년 9월 18일자)고 깎아내렸으나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게 문화주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산새들을 위해 새집을 지어준 일을 알리는 보도 기사에도 '산새들 문화주택이 생겼다'라고 제목을 달았을 정도다.(1937년 3월 7일자) 보통 집에 불이 나면 기사가 되지 않지만, 경성 시내 문화주택에서 실화로 불이 일어나 전소되면 사회면에 눈에 띄게 보도됐다.(1929년 4월 1일자·1938년 12월 30일자)

 

미모의 여성이 '문화주택'이 있음을 내세운 청년과 결혼 약속을 했다가
셋집으로 밝혀져 큰 충격에 빠진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1935년 10월 25일자.

 

 

목포에 사는 시골 처녀를 서울로 유인해 팔아넘긴 사기꾼이 던진 미끼도 "문화주택에서 음악 공부하며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이 기사의 제목은 '처녀를 꾀는 수단인/문화주택 피아노'였다.(1934년 10월 4일자)

식민지 체제에서 문화주택이란 부유한 일부 조선인이나 일본인들의 집이었을뿐, 대부분의 서민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1935년 경성에 새로운 택지가 조성되면서 7개월간 217호의 문화주택이 지어졌는데 이 중 조선사람 집은 겨우 24호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이런 문화주택 조성에 따라 영세민층은 "할 수업시 집들을 팔고 한강 건너 광주(廣州·성남시)로 속속 이주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다.(1935년 10월 31일자)

문화주택 열풍은 근대화 물결과 함께 이 땅에 불어닥친 물질만능 풍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안석영(安夕影)은 조선일보 세태 풍자란을 통해 "서양 외양간 가티 지여도 이층집이면 조하하는 축이 잇다"며 "놉흔 집만 문화주택으로 안다면 놉다란 나무 우헤 원시주택을 지여논 후에 스윗트홈을 베프시고…"(1930년 11월 28일자)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