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의 도강록>
6월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하여 7월 9일 을유(乙酉)까지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이나 걸렸다. 6월 24일 신미(辛未), 아침에 보슬비가 온종일 뿌리다 말다 하다.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30리를 가서 구련성(九連城)에 한둔하다. 이는 대체로 압록강의 발원(發源)이 먼 까닭이다.
당서(唐書)를 상고(詳考)해 보면, “고려(高麗)의 마자수(馬?水)는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마치 오리대가리처럼 푸르르매 ‘압록강’이라 불렀다.” 하였으니, 백산은 곧 장백산(長白山)을 말함이다. <산해경 山海經>에는 이를 ‘불함산 不咸山)’이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 白頭山’이라 일컫는다.
백두산은 모든 강이 발원되는 곳이어서 그 서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곧 압록강이다. 또 <황여고 皇與考>에는, “천하의 큰 물 셋이 있으니, 황하(黃河)와 장강(長江)과 압록강이다.”하였고, 진정陣霆이 지은 <양산묵담 兩山墨談)에는, “장회長淮는 남북의 큰 한계가 되는데, 장회 이북은 북조(北條 북쪽가닥)가 되어 모든 물은 황하를 조종으로 삼고 있으므로 강江으로 이름 지은 것이 없는데, 다만 장회 남쪽은 남조南條가 되어 모든 물은 대강大江(양자강)을 조종으로 삼고 있으므로 하河라는 이름을 붙인 물은 없다.
두 가닥 물 이외에 북으로 고려에 있는 물을 혼동강混同江. 압록강이라고 하고, 남으로 만조巒詔(지명)에 있는 물은 대도하大渡河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禹의 치수 사업 중에 들지 않았다.” 고 하였으나 나는 이 말들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江과 하河는 맑고 흐린 것으로 구별한 것이니, 내가 압록강을 건널 때 강 넓이는 한강보다 넓은 것이 없으나, 물의 맑기는 한강에 비할만했다. “ 그 당시에도 압록강과 백두산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음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정든 고향, 부모, 처자와 이별하고 만주나 북간도 등으로 떠나는 유랑이민자들과 애국지사들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압록강에는 강물의 드나듦에 따라 변하는 섬과 모래톱을 모두 포함하여 205개의 하중도(河中島)가 있고 이중 항상 강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진짜 섬’이 40여개 이다.
이 하중도의 소유권은 1962년 맺은 것으로 알려진 조중변계조약에 따르면 북한이 127개, 중국이 78개를 갖기로 합의했다.
압록강 하구의 큰 섬들인 위화도(12.27㎢), 황금평(11.45㎢), 다지도(9.55㎢), 구리도(6.6㎢), 우적도(4.3㎢), 유초도(2,82㎢)등은 모두 북한 땅이다.
우적도와 황금평은 한 때 섬이었으나 이후 흙이 쌓여 아예 중국에 붙어버린 ‘내륙 섬’이지만 두 섬은 모두 북한의 땅이다.
중국이 소유한 78개의 하중도 중 이들에 비길만한 넓고 번듯한 섬은 없다. 위화도에서 3km 정도 하류에 있는 월량도만이 지금은 개발 중이다.
이도 ‘북한 사람들의 탈출이 쉬워지고 경비가 어려워진다’는 북한의 ‘남의 나라 땅 간섭’으로 개발이 늦어지다 최근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북한과 중국 양국은 강은 서로 공유를 하되 섬은 공유하지 않는다고 조중변계조약에서 합의를 했다.
예외로 북한의 섬과 북한의 영토 사이는 내하(內河)라 하여 북한이 영유권을 가지고 있다.
공유의 모습은 신의주 동북동 80km 지점인 평북 삭주군 수풍발전소에서도 나타난다. 수풍댐은 1937년 10월 일제가 만든 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와 일제의 괴뢰정부였던 만주국의 공동출자로 착공돼 1942년 말 완공되었다.
한국전쟁 때 시설의 70% 가량이 파괴됐었으나 이후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댐을 복구, 1960년부터 양국이 공동으로 발전소를 운영하며 전기를 나눠 갖고 있다. (근래에는 수풍댐의 전기를 전부 북한이 사용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섬은 소유가 분명하다. 구리도보다 상류에 있는 고루자섬은 퇴적으로 지금은 중국에 붙어버렸다. 이 섬은 아예 섬 중간을 갈라 북한과 중국이 나눠 쓰고 있다.
압록강의 하중도 영유권은 확실하게 중국보다 북한에 유리하게 결정됐었으며 이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이 그 땅에서 살아 왔기 때문이다.
1)마안도와 신도 비단섬
한반도의 동쪽 끝이 독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한반도의 서쪽 끝이 ‘마안도’(馬鞍島)라는 이름의 작은 섬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신안군 가거도나 백령도 서단이라고 잘못알고 있다.
한국 교과서 지리부도에 한반도의 서쪽 끝은‘평안북도 용천군 마안도 서단’으로 나와 있다. 지금의 북한 행정구역에 따르면 용천군이 아니라 신도군이다. 따라서 ‘평안북도 신도군 비단섬 노동자구 마안도 서단’이 정확한 표기이다.
마안도(馬鞍島)는 글자 그대로 말의 안장처럼 생긴 섬으로 좌우로 길쭉하며 섬 위는 평평하고 부드러운 곡선이다. 면적 0.3㎢에 해안선 길이는 2km가 조금 넘는 작은 섬이다. 마안도의 오른 쪽에는 코를 물에 늘어뜨린 모양으로 얕은 물 위를 걷는 코끼리 형상의 코끼리 바위(북한 지리천연기념물 제63호)가 있다.
'신도군’은 한반도의 서북쪽 끝, 즉 압록강과 서해의 접점에 위치한 여러 섬들을 묶은 지역으로 가장 큰 비단섬을 비롯해 코끼리 바위, 말도, 초개도, 장도, 마안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있다.
신도는 한자로 한국과 중국 모두 ‘섶나무 신’자를 써 ‘薪島’라 표기한다. 즉 풀과 잡초가 무성한 섬이라는 뜻이다. 신도의 무성한 질 좋은 갈대는 섬유화학공업의 재료로 쓰인다. 옛 이름으로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장자도(獐子島) 혹은 장도(獐島)라는 이름이 발견된다.
지도를 보면 한반도보다 중국에 가깝게 붙어 있어 단동 동항에서 육안으로 빤히 보이고 망원렌즈를 이용하면 사람의 모습까지 찍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은 역사적으로 줄곧 우리 땅으로 기록되어있다.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고 계속 우리 관리가 상주하여 신도를 다스렸다. 실록에는 과거 중국 사람들이 신도에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지만 ‘거주’했다기보다는 몰래 들어와 물건을 훔치거나 땅을 일구던 것을 조선 관리가 군사를 동원해 쫓아냈다거나 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순조실록에는 1803년 중국 군사 300여명이 신도로 도망친 중국 죄인들을 붙잡기 위해 이 섬에 무단 상륙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중국 황제는 조선 의주부윤 서유지에게 ‘중국 죄인 6명이 신도(장자도)에 숨어들어가 살고 있으나 조선 군사들이 이들을 붙잡지 않아 군사를 동원했다’는 해명 공문을 보냈다.
이는 중국도 신도를 분명히 조선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지금은 모든 중국인들이 신도를 조선의 땅이라 인식하고 있지만. 과거 1960년부터 90년대까지 중국 정부의 지도에는 중국의 땅이라 표시하여 도상(圖上)침략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왜 도상침략을 했는지는 알려 지지 않고 있다. 2004년의 중국지도에는 분명히 조선의 땅이라 표시되어 있다.
신도는 중국과 조선 사이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여서 최근(2007년 3월) 북한은 신도군의 비단섬을 위화도와 함께 생활용품 공장과 관광레저 시설 등을 갖추고 금융 중심의 경제특구로 개발하는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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