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국립미술관에 전시 대비 ‘노아의 방주’있다 [중앙일보]
큐레이터 로비슨, 10만여 작품 중 ‘3차 세계대전 대피 0순위’ 74점 선정
앤드루 로비슨
1979년 이란 수도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에서 미국인 52명이 인질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 본토에 대한 테러 위협도 있었다. 당시 워싱턴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의 큐레이터 앤드루 로비슨(Andrew Robison·71)은 상사로부터 “아주 귀중한 작품들을 보관할 별도의 컨테이너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제3차 세계대전 같은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 컨테이너에 든 걸작이라도 황급히 안전 장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라는 취지였다.
로비슨은 고심 끝에 5만여 작품 중 대형 조각·그림 등 이동이 쉽지 않은 것들을 제외하고 캔버스에 그려진 74개의 작품을 엄선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을 특수 제작된 안전 박스에 넣었다. 박스에다 제3차 세계대전(World War 3)을 의미하는 ‘WW3’라는 글자를 적었다. 로비슨은 미술관의 작품이 10만6000여 개로 늘어난 현재에도 7개의 ‘WW3 박스’를 보관 중이라고 15일(현지시간) 워싱턴 포스트(WP)에 밝혔다.
루벤스 바로크 시대 대표 화가 페테르 루벤스(1577~1640)의 작품 ‘누워 있는 판’.
호퍼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수채화 ‘해스컬의 집’.
뭉크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목판화 ‘바닷가의 두 여인’.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철학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38년째 워싱턴 국립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 중인 로비슨은 공개되지 않은 비밀장소 두 곳에 각각 4개의 박스와 3개의 박스를 배치했다.
그에 따르면 검은색 천을 덮은 박스는 아주 커다란 책 형태다. 안의 작품들은 그림 손상을 줄이는 중성(acid-free) 매트 보드와 보호용 종이에 감싸져 있다. 4개 박스에는 유럽 화가 작품이, 3개 박스에는 미국 화가 작품이 들어 있다. 이 작품들은 특별전시회 때 잠깐 관객을 만났다가 이내 안전 박스로 되돌아간다.
로비슨이 현장에 없을 때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마치 해적들이 보물섬 지도에서 X표를 찾듯이 안전 요원들에게 박스 보관 장소를 표시해놓은 평면도가 있다”고 로비슨은 말했다. 그는 30여 년 동안 WW3 박스 7개와 74개의 작품을 관리했다. 미술관에 더욱 귀중한 작품이 들어오면 기존 작품 중 일부를 빼냈다. 이런 과정을 때문에 79년 처음 박스를 만들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박스 속에 남아 있는 작품은 전체의 27%에 불과하다.
로비슨은 박스에 들어 있는 작품 일부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는 루벤스 작품의 ‘누워있는 판(Pan Reclining)’과 분필로 그린 젊은 여인상을 첫손에 꼽았다. 렘브란트가 빨간 분필로 그린 자화상, 윈슬로 호머의 수채화 ‘사냥개와 사냥꾼(Hounds and Hunter)’, 에드바르 뭉크의 ‘바닷가의 두 여인(Two Women on the Shore)’, 에드워드 호퍼의 ‘해스컬의 집(Haskell’s House)’ 등을 언급했다.
로비슨은 ‘WW3 박스’에 들어간 작품들의 선정 기준에 대해 “가격 하나만으로 가치 판단의 기준을 삼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비싸게 구입한 작품이라고 해서 무조건 귀중하다고 볼 수 없다는 논리다.
그는 자신만의 세 가지 기준을 밝혔다. “첫째, 아름다워야 한다. 그래야 보는 사람들의 눈이 즐겁다. 둘째, 역사적이야 한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가 중요하다. 셋째, 다소 불명확하지만 나는 이것을 ‘힘(power)’이라고 부른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 심오한 정신적 충격을 주는 것, 그래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 이것이 내가 말하는 힘 있는 작품이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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