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통로를 통해본 역대 韓-中 관계 분석 책 나와
중국 랴오닝 성의 ‘요양백탑’은 요나라 때 만들어진 탑이다. 동북지역의 교통 중심지였던 이 지역은 과거 대평원이었으며 우뚝 솟은 요양백탑은 멀리에서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정표 구실을 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서기 660년 백제 의자왕 20년. 서해의 덕적도에서 긴급한 소식이 사비성으로 날아든다. 당나라군의 침공소식이었다. 중국 산둥반도에서 출발한 13만 대군을 태운 함대가 서해바다를 새까맣게 뒤덮은 것. 당시 당나라 함대가 이용한 항로는 ‘황해중부 횡단항로’. 서해를 건너 덕적도를 거쳐 남양만 일대로 이어지는 원양 항해 코스였다. 통일신라는 당나라군이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이용했던 이 항로를 장악해 나당(羅唐) 간을 왕복하며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주름잡게 된다.
한국과 중국 사이의 교통로와 무역 거점을 중심으로 양국의 관계사를 살핀 연구서 ‘한중관계사상의 교통로와 거점’을 동북아역사재단이 최근 출간했다. 집필에는 윤재운 대구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오중 손승희 영남대 사학과 교수, 김종완 우석대 사회교육과 교수, 박장배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등이 참여했다.
연구와 집필에 참여한 학자들은 양국의 교류 거점들이 ‘점’의 형태로 곳곳에 존재했으며 이를 잇는 교통로는 어느 한 국가의 국경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 거점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이동과 문화 교류, 무역과 전쟁까지 일어났던 데 주목해야 한다는 것. 지금까지의 한중 교류사가 주로 국경 개념을 기반으로 한 ‘국가 대 국가’의 접근법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처럼 ‘점과 선의 역사’로 양국 교류사를 바라본 연구는
이례적이다.
이 책에서 ‘8∼12세기 한중 해상 교통로의 변천과 의미’를 저술한 윤재운 교수는 “828년 설치한 장보고의 청해진을 시작으로 약 600km에 달하는 바닷길을 신라가 장악했다”고 설명했다. 고려 시대에 들어 항해술이 발달하고 거란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황해남부 사단항로’가 적극적으로 이용된다. 영산강 하구와 해남, 강진과 중국 장쑤(江蘇) 성과 저장(浙江) 성을 잇는 항로다.
신라에 앞서 동북아 네트워크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발해였다. 당과의 왕래는 발해가 무려 63회로 신라 41회, 일본 4회인 것을 감안할 때 압도적인 수치다.
발해는 수도 상경용천부를 중심으로 신라도·일본도·영주도·조공도·거란도 5개의 교통로를 이용했다. 이중에서 조공도는 발해와 당을 연결하는 가장 활발한 교통로였다.
신당서(新唐書) 발해 전에 따르면 이 조공도는 현재의 헤이룽장(黑龍江) 성 닝안(寧安) 현인 상경용천부에서 지린(吉林) 성∼압록강∼산둥반도의 덩저우(登州)로 연결되는 대장정 루트다. 이 시기 당나라 인들은 폐관(閉關)정책에 따라 자국민이 바다로 나가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발해의 상인들이 조공도를 통해 양국의
무역을 주도했다.
책은 해상로뿐 아니라 ‘청대의 심양과 광역 교통로’와 ‘근대 한중관계사상의 교통로와 거점’을 통해 양국 근세사에서의 교통로를 살펴본다. 선양(瀋陽)은 18세기 이후 조선과 청을 잇는 교통로이자 만주 지역에서 한족(漢族) 이주민이 모이는 저수지가 됐으며 남만주철도가 연결되는 안둥(安東)은 만주와 조선을 장악하기 위한 열강의 핵심적인 거점이었다.
김진 기자 holyj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