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란 바로 우리 민족의 혼이나 다름없다. 우리의 조상이 이 땅에서 농경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쌀 때문이다. 볍씨를 뿌려 밥이 될 때까지 여든여덟 번의 손을 거쳐야 한다는 쌀! 그래서 한자로 쓰는 미(米)자를 팔십팔(八十八)을 합친 글자로 풀이하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이 무수한 외세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지켜낸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 쌀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소중한 쌀을 생산하는 볏짚이 더없이 신성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5%2F7_29_1_5_0AV3l_IMAGE_0_80.jpg%3Fthumb&filename=80.jpg) 청풍문화재단지 가옥에 걸린 다양한 다래끼들.
옛날 우리가 흔히 쓰던 생활도구의 재료가 된 것도 대부분 짚과 풀이었다. 짚풀로 된 도구는 거의 모든 생활에서 쓰였으므로 그 종류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가마니, 멍석, 바구니, 삼태기, 동고리, 채반, 맷방석, 짚둥우리, 씨오쟁이, 두트레방석, 쇠신, 짚신, 용문석, 화문석, 바재기, 밧줄, 도롱이, 자리, 둥구미, 똬리, 망태기, 다래끼, 주루막 등등. 헤아려보면 한도 끝도 없다. 쌀농사를 가장 흔하게 지었던 까닭에 짚풀 중에서도 볏짚을 많이 이용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과거의 일반 서민들은 짚풀을 가지고 그저 단순한 도구가 아닌 보기에 좋고, 쓰기에 편한 도구를 수없이 만들어냈다. 짚풀문화를 일러 ‘서민문화의 꽃’으로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6%2F7_29_1_5_0AV3l_IMAGE_0_78.jpg%3Fthumb&filename=78.jpg) 신안군 도초도에서 만난 둥근멍석.
현재 아산의 외암리 민속마을, 강원도 영월군 서면 쌍용리와 홍천군 두촌면 철정2리, 인제군 기린면 진동1리, 경북 문경시 동로면 적성2리, 청송군 청송읍 금곡동 등에서는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에서 여러 노인들이 모여 짚풀도구를 만들고 있으며, 경남 하동군 적량면 고절리와 하동읍 신기리 등에서는 소중한 짚신 만들기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 전남 무안군 일로읍 산정리에 가면 새끼를 꼬는 마을을 볼 수 있고, 전남 화순군 북면 송단리에서는 복조리 짜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전북 무주군 설천면 배방마을에서는 인동초로 바구니를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박물관 중에서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짚풀생활사 박물관이 짚풀문화를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박물관이다. 전남 함평군 나산면 상축리에서는 우리네 농기구와 짚풀 생활용품을 전시한 개인 전시관을 볼 수 있고, 강원도 영월군 서면에 자리한 ‘들꽃 민속촌’과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에 있는 ‘두루뫼박물관’에서도 온갖 짚풀도구와 잡동사니를 만날 수 있다. 한편 경기도 파주시에서는 해마다 짚풀문화 공예품 공모전을 열어 짚풀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10%2F7_29_1_5_0AV3l_IMAGE_0_67.jpg%3Fthumb&filename=67.jpg) 부안 돌모산의 당산 옷입히기.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1%2F7_29_1_5_0AV3l_IMAGE_0_86.jpg%3Fthumb&filename=86.jpg) 용줄돌기
짚은 단순히 생활용품의 재료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신앙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집안신을 모시던 집에서는 짚으로 터주가리를 만들어 집안의 재물과 운수를 맡아 보는 터주신의 신체로 삼았고, 몇몇 섬에서는 띠풀로 띠배를 만들어 풍어제를 지냈으며, 당산제 때는 새끼를 꼬아 용줄을 만든 뒤 당산에 두르고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생활이 어려웠던 민초들은 죽어서도 관을 쓸 수 없어 짚가마니로 관을 대신한 ‘덕장’을 했고, 섬마을에서는 짚으로 이엉을 덮어 비바람을 가린 초분으로 가묘를 썼다. 과거 80년대까지 초분은 서남해 여러 섬 지역에 꽤 많이 분포하고 있었으나, 80년대 말부터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관청에서 초분을 비위생적인 장법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초분이란 것이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희귀한 유물이 돼 버렸다. 현재 초분은 신안군 도초도를 비롯해 증도, 영광군 송이도와 낙월도, 완도군 청산도 등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9%2F7_29_1_5_0AV3l_IMAGE_0_72.jpg%3Fthumb&filename=72.jpg) 위도 띠뱃놀이에서 모선이 띠배를 끌고 먼바다로 나서고 있다.
특히 송이도에서는 학계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것으로 보았던 ‘앉은초분’을 만날 수 있다. 앉은초분은 일반적인 초분에서 유골을 거두어 마치 가부좌를 튼, 앉은 사람 모양으로 뼈를 앉히고 그 위에 다시 짚으로 이엉을 덮은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초분이 길다란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앉은초분은 작은 짚가리를 옮겨놓은 것처럼 위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모습이다. 모양으로만 보면 원추형 짚가리처럼 생겼는데, 높이는 약 1미터 정도이며, 그냥 초분과 마찬가지로 아랫자락에 돌멩이를 매달아 놓았다.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1%2F7_29_1_5_0AV3l_IMAGE_0_87.jpg%3Fthumb&filename=87.jpg) 섬 특유의 임시가묘인 초분.
![](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10%2F7_29_1_5_0AV3l_IMAGE_0_68.jpg%3Fthumb&filename=68.jpg) 이 땅에서 이미 사라진 것으로 보았던 앉은초분
유독 섬 지역에서 많이 초분을 모셨던 현실적인 까닭은, 옛날 대부분의 남자들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갑자기 상을 당하는 경우, 상주가 없는 관계로 임시 무덤인 초분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고기잡이를 나갔던 자식이 돌아와 부모의 주검을 볼 기회를 주기 위한 셈이었다. 또한 과거에는 음력 섣달에 사람이 죽었을 때 땅을 파헤치면 지신이 노하고, 땅을 파헤치는 자에게도 해가 된다 하여 3년간 초분에 시신을 모셨다가 매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매장된 묘에서 탈골된 뼈를 거두어 이장할 때에도 곧바로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달 동안 초분에 모시며, 이승바람을 쏘이게 한 뒤에야 이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이런 관습과 논리만으로는 별로 초분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과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실제로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초분을 할 필요가 이제는 없지 않느냐는 뜻을 내비쳤다. 오랜 전통과 습속으로 면면이 전해오던 초분문화가 당대에 이르러 대가 끊어지게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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