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보다 10년 전인 1920년 5월 25일엔 세계일주 중이던 이탈리아 비행기 2대가 여의도에 내렸다. 석 달 전 로마를 출발, 인도와 중국을 거쳐 동경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 '신기한' 소식을 들은 수만 명의 인파가 아침부터 여의도를 가득 메웠다.
"멀리 동북편 하늘로부터 아물아물하는 검은 한 점이 홀연히 솔개와 같이 영자(英姿·늠름한 자태)를 드러내며 경성 시가를 둘러서 수만 군중 머리 위로 야실야실 스칠 듯이 한 바퀴를 돌아 가만히 내렸는데…."(1920년 5월 26일자)
수만 리 하늘을 단숨에 날아온 비행기는 조선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졌다.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 과학문명에 대한 경이감으로 사람들은 비행기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1921년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랫말까지 나오게 만든 한국인 첫 비행사 안창남은 조선 사람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던졌다. 그의 뒤를 이어 비행사 장덕창과 이기연, 여자비행사 권기옥, 박경원 등이 1920년대 조선 민중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23년 12월 이기연이 고국 방문 기념 비행을 하자 조선일보는 "프로펠라 소리를 높이 올리면서…한 바퀴를 날으매 시민들은 기쁨에 겨운 환호성이 일시에 폭발"했다고 적었다.(1923년 12월 20일자)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등 숱한 외국 모험가들의 비행 소식은 사람들을 더욱 설레게 했다.
이 땅 곳곳에서도 비행 경기 대회가 열리고 행사 때마다 축하 비행이 빠지지 않았다. 1926년 조선일보 주최 제2회 중학야구리그전 개막식 때는 시구용 공을 비행기에서 그라운드의 조선일보 이상재 사장에게 던져 주는 이벤트까지 열렸다.(6월 19일자)
1929년에는 경성~울산 간, 경성~대련 간 여객 운송이 개시되며 본격적인 비행 시대가 열렸다. 하늘 구경이 목적인 유람비행도 시작됐다. 1929년 5월 문을 연 조선비행학교는 유람비행 사업도 병행했다. 서울상공 유람은 5원, 인천 유람비행은 10원이었다.
조선일보 1931년 1월 4일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30년 경성 시민의 달콤한 유혹의 하나는 비행기 놀이였다. 인천까지 단 7분 동안 유람비행을 하는데 10원이다. 사람들은 10원짜리 지폐를 던지고는 '죽어도 말 없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고 다시 돌아올는지 말는지도 모르는 위대한 길을 떠난다. 유서도 없이. '스피드 시대' 아니 '초스피드시대'의 축복받은 총아는 비행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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