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1.05.16 00:24 / 수정 2011.05.16 09:10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만난 건 1990년 가을이었다. 중앙일보는 박 대통령의 통치 비사(秘史)를 다룬 ‘청와대비서실’을 시작했는데 내가 시리즈 (1)을 맡은 것이다. 나는 1년2개월 동안 장관·의원·비서관·군인을 지낸 박정희 부하들을 많이 만났다. 박정희뿐 아니라 부하들의 스토리도 드라마였다.
남은 인생을 박정희를 기록하는 데 쏟아 넣었던 ‘9년3개월 비서실장’ 김정렴, 80년 신군부에 보복을 당해 세상을 등졌던 중화학·방위산업의 설계자 오원철, 처음 만든 벌컨포의 사격실험에서 유탄에 가슴이 뚫린 이석표, 대통령의 해진 혁대를 회고하며 눈물 짓던 이발사…. 이런 부하들 속에서 박정희는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부하들은 한결같이 박정희의 애국심과 인격을 증언했다. 주군(主君)이 피살된 지 10여 년이 지났으므로 그들에겐 비판의 자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하자(瑕疵)에 관한 증언은 거의 없었다. 대신 청렴과 애국의 추억만 가득했다. 청와대 집무실의 파리채, 변기물통 속의 벽돌, 칼국수 점심…. 그리고 민족중흥·조국근대화·수출입국·새마을운동 같은 전설적 단어들뿐이었다.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증언’은 기자인 나에게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도 취재했다. 그중 어떤 대통령도 박정희처럼 부하들로부터 일치되고 단결된 칭송을 듣지 못했다. 이들의 부하들은 주군의 공적과 함께 잘못과 결점을 빠뜨리지 않았다. 주군들이 살아있음에도 그러했다. 이것만 봐도 후임자들은 박정희보다 훨씬 불완전한 지도자였다. 그래서 나는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가능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특히 “양 김씨는 민주주의도 함께 해냈을 것”이란 말은 더욱 믿지 못한다. 이런 얘기야말로 소설이다.
도대체 박 대통령은 어떤 인간이기에 수많은 부하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발견한 박정희는 대표적인 ‘공동체적 인간’이었다. 대다수 사람은 그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추동(推動)하는 평범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지도자는 개인의 욕구보다는 공동체의 개선을 추구한다. 인류문명의 진보와 공동체 발전에 개인의 궤적을 합일(合一)시키는 공동체적 인간…. 그런 인간 유형의 대표적인 사람이 박정희였다. 그런 박정희가 나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
1960~70년대 한국에서 ‘공동체 발전’은 안보와 가난 극복, 그리고 경제발전이었다. 민주주의는 그 시대의 과제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박정희 개발독재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시초였다. 민주주의라는 건 경제개발로 중산층이 형성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절은 지금과 달랐다. 북한의 적화(赤化) 위협 속에서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선 국력의 비상한 결집이 필요했다. 그래서 개발독재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청렴했으며 그의 독재는 공동체를 위한 개발독재였고 나라를 지킨 애국독재였다.
박정희를 알게 된 이후 나는 ‘공동체를 속이는 지도자’에게 깊은 반감(反感)을 갖게 되었다. 공동체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서, 입만 열면 공동체를 외치면서 현실에선 공동체를 배반하는 사람…. 이런 위선을 고발하고 싶은 것이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걸 부인했다. 지금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 행위에 대해 내가 종교에 가까운 분노를 느끼는 건 박정희 덕이 크다. 북한의 위협을 막아내며 3000만 국민을 패배주의의 음지로부터 ‘하면 된다’의 양지로 이끌어낸 지도자 박정희…. 그가 살아있다면 민주당 의원들을 전부 백령도로 데려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죽은 이들이 누구이며, 누가 그들을 죽였으며, 자유민주국가들이 왜 한결같이 살인자를 규탄했는지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오늘이 5·16 군사혁명 50주년이다. 50년 전 새벽, 한강 다리 위에서 박정희 소장을 비껴간 헌병대 총탄에 감사한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