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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李承晩 대통령의 미국 여행 이야기(中) - 2

淸山에 2013. 3. 16. 17:59

 

 

 

 

  
  미국 외교기자클럽 오찬 간담회 ② (17)
 
  “美國이도와준다면 공산주의의 불길 반드시 진화”
 
  1954년 7월 30일 정오, 미국 외교기자클럽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우선 언론인의 사명을 강조하고, 자신의 방미배경, 그리고 한반도 문제 해결에 관한 미국의 군사적 역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개괄적으로 소개했다. 그의 연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해 보니, 현 시점에서 그 어떤 군사적 행동에도 반대하는 상당한 여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에 관한 우리의 제안들이 시기상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 국민 여론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에 관한 특별한 권고안을 다루는 것보다, 전반적인 상황을 광범위하게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미 의회연설은 그러한 수준에 맞춰진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간직해 왔고,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 공산주의의 정복 야욕에서 민주주의를 구하려 한다면 중국을 우선 구한다는 결정을 지금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 문제는 한국문제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 문제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없으면, 아시아의 생명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중략)
 
   만일 중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놓이고 아시아의 다른 지역이 공산 통치하에 들어간다면, 대한민국은 독립국가로, 통일국가로, 민주국가로 결코 계속해서 존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의회연설에서 우리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미국의 정책이 중국을 먼저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중략)
 
   만일 이와 반대로, 우리가 행동의 우선순위 목록에서 중국을 하위에 놓는다면 중국의 구출을 가능케 하는 통로들을 잃어버리는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나는 미국이 중국을 지금 공격하라고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제안한 것은 미국이 중국을 구하는 데 필요한 단안을 내려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즉, 미국이 중국의 해방을 항구적인 정책과제의 일부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가능한 한 빨리 그 정책을 강화하고 실천하는 데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오. 친구들이여. 공산주의가 얼마나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 왔는지 말입니다. 전 세계가 다 알다시피 볼셰비키가 그들의 청사진을 작성한 것은 40년 전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민주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인 미국’의 정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복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상 우선순위 제1번이 돼 왔습니다. (중략) 그들은 그러한 목표를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왔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지난 40여 년간 밤낮없이 일해 왔습니다.
 
   계획과 행동으로 공산주의는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반이 지금 공산치하에 들어갔습니다. (중략) 중국 역시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필사적으로 항전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중국은 미국의 도움으로 투쟁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무기ㆍ탄약ㆍ기타 원조가 조달됐고, 얼마간 자유라는 대의를 지키기 위한 전투는 잘 진행됐습니다.(중략)
 
   그러나 미국인들은 중국에 내전이 중지되고 연립정부가 성립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평화가 회복되지 않으면, 원조를 철회할 것이라는 시사를 함으로써 중국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인들은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고, 소련 측으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우유부단한 아시아 정책을 꼬집은 이 대통령은 의회연설에 이어 또다시 신랄한 어조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한국 역시 환멸과 실망을 경험했습니다. 한국의 분단은 가공할 타격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민주정부와 개인의 자유가 위태롭게 될 때에는 미국이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정세는 한국의 이익과는 반대로 전개됐고, 우리는 혹독한 시련에 처하게 됐습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오늘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우리나라가 너무 과도하게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의구심을 보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미국이 너무도 결단력이 없고, 너무도 기회주의적으로 시류에 따라 표류하고, 너무도 행동을 주저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도처에서 승승장구하며 점차 가속도를 내어 우리에게 가까이 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략)
 
   언론인 여러분, 이 나라에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지배를 도모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위대한 성전을 시작해서 지금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어야만 합니다. (중략) 이러한 성전은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라도 수행돼야 한다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물론 한국은 열심히 참가할 것입니다. (중략)
 
   결국 미국과 자유세계의 확고한 정책, 진리를 알리는 성전, 막강한 힘의 정책 등과 같은 조치들은 중국과 기타 아시아 국가들의 용감하고 광범위한 반공산주의 세력들을 일깨워서 그들을 속박하고 있는 자들에 대항하는 고유의 성전을 시작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미 의회의 모든 내 친구들이 이 연설을 읽어서 내가 그들과 미국 국민에게 말하고자 했던 바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때때로 내 친구들은 나를 예언자라고 말해 왔습니다. 내가 국제정치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을 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나는 내가 예언자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보려고 하며, 특히 그 동기들, 힘의 역학관계, 그리고 우리의 적이나 잠재적인 적들이 야기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들을 평가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내가 중국에 대한 강경하고 확고한 정책이 중국뿐만이 아니라 한국ㆍ동남아시아 그리고 미국을 구할 수 있다고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나의 이러한 평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국민에 대한 호소로 이날 연설을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친구들이여, 나는 미국 국민이 세계 문제를 현실적으로 관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을 거듭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내가 만난 미국인들로부터 정말로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나와 우리나라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이 민주국가로 평화스럽게 존속하려면 아시아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듣거나 읽어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강경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만한 거대한 힘의 저장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 국민입니다.
 
   언론인 여러분에게 촉구합니다. 여러분께서 미국 정부와 함께 위대한 힘의 원천인 미국 국민에게 호소해 주기 바랍니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 또는 자유를 보전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을 지원하자고 말입니다.
 
   미국인들이 도와준다면, 우리는 반드시 공산주의의 불길을 진화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과 자손을 위해 평화롭고 보다 더 나은 세상을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미국 신문과 방송은 이날 연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54년 7월 31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1ㆍ2ㆍ6면 등 3면에 걸쳐 보도할 정도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와 獨島 무인등대 點燈 (18)
“우리가 하는 일…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승만 대통령과 독도에 관한 얘기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 대통령은 방미 기간 중에 독도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는 독도 등대 설치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이 대통령이 마지막 기착지인 하와이에 체류하던 1954년 8월 10일 정오(하와이 시간 1954년 8월 9일 저녁 6시)에 독도 무인 등대에 점등하고 세계 각국에 이를 통보했다.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참하게 패망한 이후에도 집요하게 영토 문제를 제기해 오고 있었으며, 독도 영유권 주장도 그중 하나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 당국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은 아마 우리 정부의 등대 설치가 아닌가 한다. 일본 측이 독도에 무언가 심각한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1954년 7월 말이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57년 전인 1954년 7월 31일자 뉴욕 타임스 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날은 이 대통령이 1주일간의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뉴욕으로 향하는 날이었다. 묘하게도 이날 뉴욕 타임스지는 “한국이 섬들을 점령하고 있다고 일본이 주장”이란 제목 아래 일본 측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독도 관련 기사를 크게 다뤘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독도를 점령하고 작업 중이라고 일본이 주장”이란 소제목이 달린 이 기사는 단순한 사실 보도가 아니었다. 제1면과 2면에 지도와 함께 장문의 기명 기사를 실었으며, 더구나 기사를 쓴 인물은 린드세이 패롯(Lindesay Parrottㆍ1901∼1986)이었다. 패롯은 제2차 대전과 6ㆍ25전쟁 기간 중에 종군기자로 맥아더 장군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이 기사를 쓸 당시에 10년째 뉴욕 타임스의 도쿄지국장으로 근무하던 베테랑 기자였다.  일본 정부의 정보에만 의존한 편파적인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 소식통은 7월 30일, 한국이 독도(Takeshima로 표기)를 점령했다고 말했다. 2척의 일본 순시선이 독도 인근을 순찰하던 중, 6명의 한국인이 독도의 2개 섬 중의 하나인 동도(Mishi Island로 표기)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 해상보안청은 한국인들이 흰색 셔츠에 초록색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분명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파견된 경비대였다고 밝혔다. 한국인들이 무장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커다란 텐트가 그곳에 세워진 것을 보면 그 섬에서 머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고 덧붙였다.” “그곳 표지판에 적혀 있듯이 한국인들은 적어도 7월 25일부터 그곳을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과거에 어부들이 때때로 조업을 하던 때와 같은 일시적인 체류가 아니라고 일본 측은 추론했다. 인근에 한국 선박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한국인들은 상당기간 지탱할 물품들을 사전에 이 섬에 실어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어 뉴욕 타임스는 독도의 지리적인 위치를 소개한 다음, 일본 측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했다. 더욱이 기사에는 독도라는 우리 표기는 일절 보이지 않고 다케시마라는 용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학술조사, 한국영토라는 표지판 및 등대 설치, 독도 경비대 상주, 독도 접안시설 설치 등의 실효적인 조치를 취하고 독도의 영유권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의지를 천명해 왔다. 더구나 이승만 정부가 “이승만 라인”(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인접해양에 대한 대통령 선언’에 의해 설정한 수역으로 ‘평화선’이라고도 불리며 독도를 라인 안에 포함시킴)을 발표하고, 특히 李 대통령의 방미 기간을 이용해서 독도 등대를 점등한 것은 타이밍이 절묘했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실효적인 지배와 함께 이제부터라도 해외홍보, 특히 해외 주요 미디어를 대상으로 한 홍보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지만 1954년 7월 31일자 뉴욕 타임스가 독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필자의 지적을 계기로 독도가 세계 언론에 어떻게 보도돼 왔는가 하는 연구가 이뤄졌으면 한다. 독도는 알파벳으로 언제부터 어떻게 표기돼 왔으며, 보도 내용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향후 독도에 관한 해외홍보가 적극적으로 전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워싱턴을 떠나 뉴욕에 도착 뉴욕 타임스가 독도 관련 보도를 했던 7월 31일, 이승만 대통령은 일주일간의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오전 10시 3분 비행기 편으로 뉴욕으로 향했다. 워싱턴 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전 李 대통령은 국내외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고별인사를 했다.  

“워싱턴을 떠나자니 다소 서글픕니다. 아마 더 이상 이곳을 방문하지 못할 것 같아 그렇습니다.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미국 정부와 국민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태도와 후의를 보여준 데 대해서 매우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 대통령 일행은 같은 날 오전 11시,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했다. 데이비드 남궁 뉴욕 주재 한국총영사, 리처드 패터슨 뉴욕시 영접위원회 회장 그리고 한복을 입고 웃음을 띤 100여 명의 한인동포들이 열렬히 환영했다. 몇 명의 중국(자유중국)인들도 환영객 중에 끼어 있었다.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도착했을 때, 호텔 건물 정면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간단한 오찬을 마친 이 대통령은 오후 3시, 호텔에서 독도에 관한 보도에 대해 뉴욕 타임스와 단독 기자회견을 가졌으나, 독도에 관한 질의나 응답은 없었다. 이어 저녁 6시부터 약 1시간 동안 맥아더 장군과 환담했다. 뉴욕에서 첫 공식행사는 저녁 8시, 남궁 뉴욕 주재 한국총영사가 주최한 환영 리셉션이었다. 총영사관 건물에서 개최된 리셉션에는 학생ㆍ사업가 등 한인 동포 100명 이상이 모였다. 이 대통령은 우리말로 짤막한 인사말을 통해 모든 한국인이 조국의 궁극적인 통일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파운드리 감리교회에서의 특별예배 

李 대통령은 8월 1일(일요일),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가 파운드리 감리교회의 특별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에는 미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노울랜드 의원, 전 주한 미 제8군 사령관 밴 블리트 장군 등도 참석했다.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아주 감동적인 즉흥 연설을 했다. “한국이 자유롭게 된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만약 우리가 100만 공산군을 북한에서 몰아내려고 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가공할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 순식간에 인류의 문명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수소폭탄보다도 더 위력적인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아시아 최상의 최강의 반공 군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우리가 하는 일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감싸는 하느님이실 뿐만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모두 나를 비난하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하느님만이 나를 질책하시지 않는다면 그뿐입니다.”

 

 

 

 

 


海外戰爭 參戰勇士會 연례 총회 참석 ① (19)

“한국 땅에서 피 흘린 여러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1일 저녁, 방미기간 중 실내 행사로서는 가장 참석자가 많은 행사에 연사로 나서기로 예정돼 있었다. 워싱턴에 도착해 일정을 마치고 뉴욕으로 갔다가, 주말을 이용해 8월 1일, 오전에 워싱턴으로 이동해 파운드리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같은 날 저녁에 다시 뉴욕 인근의 도시 필라델피아로 이동한 것이다. 80세 노인을 위한 일정으로는 소화하기 힘들었지만, 이 대통령으로서는 피곤보다는 신이 났다.

바로 미국의 예비역 군인들의 모임 중에서는 가장 강력하고 회원 수가 많은 외국전참전용사회(Veterans of Foreign Wars: VFW) 연례총회행사에 초청강연을 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전참전용사회는 해외에서의 전투에 참가한 장병들의 모임이며, 1899년 발족돼 1936년에는 미 연방법에 의해 미 정부의 공인기관으로 승격됐다.

 이 조직은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기부금으로 운영되지만 150만 명이라는 회원의 숫자에서 보듯이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단체다. 참고로 본부는 미주리 주의 캔자스시티에 있지만, 미 전역에 7700여 개의 지부가 있다. 외국전참전용사회는 미국 전역을 돌며 정기 총회를 개최하는데, 마침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필라델피아 컨벤션 홀에 행사가 마련됐다.

 이날 행사를 위해 이 대통령이 8월 1일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에 필라델피아 공항에 도착하자, 외국전참전용사회 대표 웨인 리처드 사령관 내외를 위시해 미 전 지역 간부 및 부인들, 존 파인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및 주정부 간부들이 나와 환영해 주었다. 애국가가 연주되고 펜실베이니아 주 방위군 소속 미 제111전투단 제3대대 장병 500명을 사열한 후, 이 대통령은 특별 오토바이 호위대의 인도를 받으며 행사장인 컨벤션 홀에 입장했다.

 홀에는 5000여 명의 청중이 운집해 있었다. 1주일간 진행되는 연례 총회 행사 중 이날은 추모행사가 진행돼 박수를 치지 않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리처드 회장이 이 대통령을 ‘역사적인 인권 수호자’라고 소개하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기립해 박수갈채로 환영했다.

 이 대통령은 행사장의 분위기에 한껏 고무됐으며, 대한민국의 자유와 정의,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외국에서 숨져간 미군 장병들은 물론, 살아서 그 자리에 모인 애국자들에게 말문을 열었다. 시계는 미국 동부시간으로 정확히 1954년 8월 1일 저녁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에 서 있습니다. 바로 자유국가의 용맹스런 전사들 가운데 선 것입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한국 땅에서 내 조국과 미국,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의 군대를 시찰하러 전선을 방문합니다. 이런 시찰을 통해 나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하는 장병들로부터 커다란 자극을 받고 더 나은 인간이 돼 국가의 업무로 복귀합니다.

 전투 장병에게는 고상하고 성스러운 그 무엇이 느껴집니다. 이는 전투 중이든 아니면 우리를 항상 위협하는 적을 경계하든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삶은 고되고, 위험하며 헌신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삶은 보람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장병은 그가 정당하고 옳다고 알고 있는 대의를 위해서 투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추모행사는 힘이 정의를 만들지 않는다는 위대한 원칙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분들에게 헌정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영웅이 자기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서 수천 마일 떨어진 한국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분들이 그곳에 간 것은 자유와 독립을 열망하는 평화로운 국민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잔인한 침략자를 막고, 격퇴한 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영원한 영예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리의 목표가 성취되지 못한 것은 그러한 용기를 가지고 한국을 방어했던 분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삶이란 언제나 먼저 살다간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며, 특히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친 분들에게 신세를 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세에 보답하는 길은 자유의 횃불을 높이 드는 것입니다. (중략)

 나는 한국 땅에서 피를 흘린 여러분, 그리고 전몰장병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투쟁의 목적이었던 그 대의는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타협의 산물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위업과 희생이라는 감동적인 행위는 옳은 것과 정의가 승리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나는 또한 전몰자 유족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결코 갚지 못할 정도로 빚을 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음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넓게 보자면, 여러분의 사랑스런 가족이 목숨을 바쳐 지켰던 대의를 위해 우리 한국인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싸울 결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중략)

 여러분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오늘날 세계 정세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여러분과 논의하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한국을 구하기 위한 미국 젊은이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중략)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제 탱크와 대포를 가지고 한반도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을 때, 나는 단파방송국으로 가서 나의 고뇌를 토로했습니다. `적들이 우리 문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미국 친구들은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렵니까?' 나는 누가 들을 것인지, 아니면 누가 신경을 쓸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만 마일이나 떨어진 워싱턴DC에서 미국 대통령 한 분이 각료회의를 소집해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미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략)

 미군과 유엔군이 한반도로 투입되자, 전쟁의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뀌었습니다. 한국 장병들은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완전한 승리가 확실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싸움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러자 당시 유엔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한국군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국인들은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6명의 한국군 대령이 소위 ‘전술적 후퇴’에 항의하기 위해서 어느 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전쟁은 정체상태에 빠졌고 적과의 쓸모없는 토론에 휘말렸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과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최후의 승리를 할 힘과 가능성이 있다고 누누이 천명했으나, 우리는 북쪽으로 밀고 가지 못했습니다. 왜 일까요? 그 이유는 내 생각에, 우리가 제3차 세계대전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핵무기가 가공할 무기이며 한순간에 모든 문명과 모든 인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취지의 선전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이런 선전이 효과를 발휘해 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자유세계 전체가 굴복하게 된다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되고, 그렇게 되지도 않으리라고 봅니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핵무기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유롭게 죽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전 세계에 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들 중의 다수가 자유를 위한 투쟁을 촉진시킬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생명을 버린다면, 위대한 대의를 위해서 바쳐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때, 바로 그때에만 우리는 자신들을 보호하고, 우리의 생명의 길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대통령의 연설은 여기서 잠시 중단됐다. 그는 아직 미국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포문을 열지 않고, 참석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모으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海外戰爭 參戰勇士會 연례 총회 참석 ② (20)

“교착상태 빠진 전쟁… 미국은 정신 바짝 차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본 연재물 제19화에서 보았듯이 연설의 서론 부분에서 이 대통령은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산화한 미군 장병의 영혼과 그들의 유가족을 위로하고, 역경 속에 살아남은 참전용사, 그리고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이어 그는 오늘 소개하는 본론 부분에서 보듯이 미국의 우유부단한 한반도 정책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어느 국가의 지도자도 감히 엄두도 못 낼 배짱을 갖고 미국 여론을 선동하는 자유와 정의의 투사였다.  

최근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우리의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흔히 듣는 얘기가 있다. 냉전체제가 끝난 지 20년이 넘었는데, 우리는 아직도 냉전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이제 남북관계도 냉전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수구적이라고 몰아세운다.  

 그것도 모자라 역사를 거꾸로 돌려 해방 후 우리의 정치상황과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을 그들만의 궤변과 오늘의 잣대로 다시 써보려고 획책한다. 이런 그들에게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낱 권력욕에 사로잡힌 미국의 앞잡이요, 친일파의 후견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ㆍ궤변ㆍ잣대가 얼마나 역사와 현실에 동떨어진 것이며 허구적인지를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필라델피아 외국전참전용사회 연례총회 참석 연설은 그 좋은 예의 하나다.

 “한반도는 민주적이고, 독립적이며, 통일 국가가 돼야 합니다. 그러나 공산 국가로 돼서는 안 됩니다. (중략) 그런데 한국인들이 잘못 알고 있든지 아니면 오해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미국이 진실로 무엇을 하려는지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휴전회담,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 적과의 협상 등을 생각할 때면, 미국이 자유를 보전하려는 전쟁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중략)

 미국이 자유우방국가들을 대하는 태도와 소련이 자기의 노예가 된 위성국가를 대하는 태도를 비교해 보면 혼란스럽고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소련은 위성국가에게 공산주의의 세계정복을 공언하고, 위성국가들이 그 의지와 결의를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이에 비추어 자유세계의 주축인 미국은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확고부동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두려움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심각한 심리적인 효과를 초래합니다.

 동물조련사는 사자 우리 속에 들어갈 때, 그가 무서워한다는 것을 사자에게 결코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만약 그러면, 반드시 사자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곰과 대적하는 미국은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정책의 우유부단함을 드러내고, 여기서 찔끔 저기서 찔끔, 또 다른 어떤 곳에서는 조금 더 많이 양보하는 정책을 취합니다. 그 결과, 항상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우유부단한 정책이 나옵니다. 그러니 미국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라는 자유세계와 그 국민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미국에 대해 신뢰하지 않기 시작하며, 자유 수호의 희망을 상실하기 시작합니다.

 자유세계의 챔피언은 하루는 수백만 달러를 지원하고, 다음날은 그 돈을 회수해서는 안 됩니다. 동맹국에게 무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자유국가에게 단숨에 싸울 것을 촉구해 놓고는, 얼마 후 싸우지 말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한 행위는 친구와 지지자들을 크게 낙담시키는 것이니, 어떤 위험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피해야만 합니다. 미국을 위한 올바른 진로는 확고부동하고, 강하며, 용맹스러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동맹국들도 동일한 능력을 발휘할 것이고, 적도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외국전참전용사회 여러분은 이러한 일을 해내는 데 매우 크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중략)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지금이나 후에나 언젠가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하며, 오래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우리에게 더 불리하다는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설득하는 일입니다. 만일 국민들이 반드시 적에 대항한다는 단합된 의지를 보인다면, 정부는 그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

 며칠 전에 나는 여러분의 위대한 의회에서의 연설에서 미국은 중국 본토를 해방시키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두라고 제안했습니다. 중국이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아시아를 구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확고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단호하게 실행에 옮긴다면, 죽의 장막 뒤에 있는 중국 국민은 공산주의자와 어디서든 투쟁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공산주의자들은 꼭 한번 저지됐을 뿐이며, 그것도 한반도에서 무력에 의해서 저지된 것입니다. 우리가 전투를 중단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침략의 과실을 유지하고 즉각 재침 시도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곳에서 행군 중입니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한 나라 한 나라씩 소련이라는 암흑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으며, 이렇게 하나씩 상실함으로써 우리와 우리의 대의명분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사람은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엇을 양보해서라도 어떻게든 전쟁을 피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전쟁보다도 더 나쁜 것은 없다고 하면서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을 구슬려서 결국에는 우리와 평화적으로 공존의 장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러한 주장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도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평화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요구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그 대가란 그들에 의한 세계정복인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자유와 모든 해방의 종말입니다. 그것은 크렘린의 전체주의 지배입니다. 그것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것이며, 모두의 사상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 올린 문명사회 내의 모든 가치들을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ㆍ자비ㆍ동정 그리고 자신보다 더 위대한 힘을 믿는 인간 신앙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내게 그러한 운명은 죽음보다 나쁘고, 전쟁보다 나쁘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나쁜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는 인간의 멸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철저히 반대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저 평화만을 사랑하는 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미국이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해 주십시오. 공산주의에 대한 위험뿐만 아니라, 평화에 대한 그릇된 기대 때문에 모든 것을, 심지어 개인까지도 희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위험에 대해서 말입니다.

 미국이 정의와 자유의 편에 서서 두 번씩이나 세계를 구원했던 바로 그 정신을 다시 점화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그 이전에 위대한 공화국의 창업과 이후 그 보전을 이끌었던 정신을 다시 점화시켜 주십시오.

 대의명분이 옳고 달리 방법이 없을 때, 여러분은 항상 싸웠고 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대의는 옳으며, 그것을 지키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같은 대열에 서 있습니다.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잔혹한 압제자들에게 행동으로 대항할 기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공산주의의 물결을 밀어내고, 자신과 자식들을 위해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리지 맙시다. 우리의 대의명분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과 완전히 승리한다는 확고한 결심을 갖고 전투를 준비합시다!”.


 

 

 

뉴욕시민 환영 퍼레이드 (21)

“양국 국민이 단결하는 한 장래 희망이 있습니다.”

워싱턴과 필라델피아에서의 바쁜 하루를 보낸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 2일 월요일 새벽 12시 10분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국빈방문 일정으로는 이례적인 야간 이동이었다. 항공기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 대통령 일행은 즉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로 향했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뉴욕에서 가장 역사 깊은 최고급 호텔이다.

 요즘에는 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 당시만 해도 국빈방문의 꽃은 오픈카 퍼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수십만에서 백만 명의 시민들이 국빈을 환영하고, 고층건물에서 오색 테이프를 날리는 행사인 퍼레이드는 초청국과 방문국의 우의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다. 특히 뉴욕의 그것은 정평이 있었다. 원래는 외국원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공훈이 있는 미국 영웅들에게 예우를 표시하는 행사였다.

 6·25전쟁 발발 이후 맥아더 장군이 뉴욕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외국원수로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 퍼레이드에 초대되는 영예를 얻었다. 그만큼 미국 정부나 국민은 아시아의 반공전선을 지키는 대한민국 국민과 대통령,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감한 대한민국의 국군에 대해 각별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8월 2일. 이날은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오전 10시 와그너 뉴욕시장 부부가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모시러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도착했다. 시장 부인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꽃다발을 선물하고 두 내외는 담소했다. 이 대통령 내외와 와그너 시장 일행이 호텔을 출발한 것은 11시 30분이었다.

 퍼레이드는 로우어 브로드웨이(Lower Broadway)에서 환영식장이 마련된 뉴욕시청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30여 대의 차량이 이동하는 동안 행인들의 횡단을 막기 위해 목책을 쳐 놓은 거리에는 100만 명의 뉴욕시민들이 도열해 박수를 보냈으며, 고층 건물에서는 눈보라처럼 쏟아지는 오색종이와 테이프가 뿌려졌다.

 이 대통령은 와그너 시장과 제1호차에, 프란체스카 여사는 시장 부인과 제2호차에 탑승했는데, 이 대통령은 열렬한 환호에 매우 흡족해하며 오픈카에서 일어나 모자를 흔들어 환호에 답례했다.

 정오에 일행은 뉴욕 취주악대의 연주 속에 시청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는 뉴욕 시의 각계각층 인사, 군 지휘관, 그리고 뉴욕 시민 2만5000명이 이 대통령 내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행사 시작과 함께 와그너 시장이 말문을 열었다.

 “뉴욕 시 의회 의장님, 귀빈 여러분, 뉴욕 시민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명예로운 소중한 친구이자 동반자이신 이승만 박사님. 대통령님이 유엔의 고장이자, 자유세계의 중심지인 뉴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뉴욕의 800만 시민은 귀하의 용기, 귀하의 용감한 행위, 귀하의 애국심, 귀하의 자유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귀국의 국민과 같이 인간의 자유, 인격의 고귀함, 그리고 공동의 명예를 신봉하는 우리 모든 미국 국민의 애정, 따뜻한 마음씨 그리고 찬사를 모아 환영인사를 드립니다.

 1950년 공산주의자들이 무자비한 공격을 개시했을 때 대통령님께서 홀로 전례 없는 용기와 역동적인 지도력을 가지고 한국 국민을 자유의 기치 아래 동원했습니다. 이를 역사는 영원히 새겨 놓았으며, 지구상의 인간은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뉴욕은 특별히 자랑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 소재하는 유엔이 그 존립 목적과 본질에 관한 최초의 중대한 시험대에 섰을 때 귀하의 나라를 지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유엔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대의명분을 내걸고 대한민국을 도왔습니다.

 대통령님, 귀하는 마음과 정신이 젊었습니다. 귀하는 애국심과 민주주의의 상징입니다. 귀하께서 이곳에 오신 것을 반갑게 생각하며, 언제나 유엔의 고장인 뉴욕을 귀하의 도시, 귀하의 고향으로 기억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와그너 시장은 간략한 인사말 후에 이 대통령에게 뉴욕 명예훈장과 기념증서를 주었다. 이어 밴플리트(1892~1992: 6·25전쟁 중 우리 국군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으며, 공군조종사이던 외아들이 1952년 북한지역에서 작전 중 전사) 장군이 이 대통령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대통령은 세계 반공진영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만날 때 눈물을 보이며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미국의 청년들이 한국에까지 와서 싸워주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부디 귀국 정부에 건의해서 미국 청년을 이곳에 보내는 대신에 무기를 보내주라고 하시오. 그러면 모든 싸움과 피 흘리는 희생은 우리가 맡아서 할 것이오.’ 이 대통령은 나를 비롯한 우리 미군 장병들을 사랑으로 대해 주었으며, 우리는 그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훈장을 수상하고 밴플리트의 소개인사 후 이 대통령은 광장에 모인 뉴욕 시민 앞에서 훌륭한 영어로 간단한 즉흥 연설을 시작했다.

 “뉴욕 시민 여러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나는 제3차 세계대전을 지금 하느냐 혹은 시기를 미루느냐하는 점에서만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나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전 세계를 파국으로부터 구출하려고 한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조만간 일어날 것이며, 늦어지면 그것은 더 끔찍해질 것입니다. 미국인들과 다른 자유세계 국민들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 행동해야만 합니다.

 밴플리트 대장이 훈련시킨 한국 청년들이 이제 극동 최강의 반공군대로 변모했습니다.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밴플리트 장군이 다시 한국에 와서 더 많은 한국 군대를 양성해주기 바랍니다.”

 여기서 잠시 연설을 멈춘 李 대통령은 연설의 달인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퍼레이드 도중에 차량 행렬을 선도하던 오토바이 순찰대장 조지 피츠패트릭(George Fitzpatrick)의 아들이 1952년 한국 전선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청년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로 가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귀국의 청년들과 우리 청년들이 목숨을 바쳐 싸워 온 정신입니다.

 피츠패트릭 군과 같이 수많은 미국인들이 역사상 여러 차례 그들이 신봉하는 자유를 위하여 싸워 온 것처럼, 우리 한국인들도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싸울 용의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자유가 생명 자체보다도 더 귀중함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양국 국민들이 굳건하게 단결합시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한 장래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다 같이 살아서 희망과 안전의 새날의 서광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하느님이 여러분께, 그리고 우리가 함께 지탱하는 대의에 축복을 주실 것을 기원합니다.”

 국가원수의 연설은 이같이 감동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감동적인 연설은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타인을 감동시키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었기에 이런 훌륭한 연설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바쁜 퍼레이드 중에 조지 피츠패트릭 순찰대장을 불러 격려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뉴욕시장 주최 오찬회 및 명예박사학위 (22)

“공산분자들은 오직 힘으로만 격퇴할 수 있습니다”


1954년 8월 2일 오후 1시, 뉴욕 시청 광장에서 환영행사가 끝난 후, 와그너 시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월도르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남자들만이 참석하는 오찬회(stag luncheon : `stag'는 수사슴을 의미하며 `stag luncheon' `stag party'는 여자 동반 없이 남자만 참석하는 오찬회, 파티임)를 개최했다. 행사는 애국가와 미국 국가연주로 시작됐다. 이어 축원기도가 있었는데, 미국의 저명인사인 프란시스 스펠만(Cardinal Francis Joseph Spellman, 1889~1967) 추기경이 집전했다.

▲뉴욕 시장 주최 오찬회

스펠만 추기경은 미국 가톨릭의 대명사처럼 추앙받는 분이었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와도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던 절친한 친구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그는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과 함께 이 땅을 처음 밟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같은 해 10월 16일 미국에서 환국하기 1개월 전이다. 이후 6·25전쟁 기간 동안인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매년 성탄절에 우리나라를 방문해 주한미군의 신앙생활 및 한국의 천주교 발전을 위해 큰 기여를 했다.

여담이지만, 6·25전쟁 중에 기독교는 미군이나 우리 국민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구교의 스펠만 추기경 이외에 신교의 빌리 그래함(William Franklin Graham, Jr. 1918~ )의 선교활동도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북한의 군사적 이념적 위협에 단호히 대처할 것을 촉구했을 뿐만 아니라, 1952년 12월 겨울휴가를 반납하고 부인 루스(Ruth)와 함께 방한한 적이 있다. 마침 스펠만 추기경이 방한했을 때와 겹치는 시기였다.

오찬회가 시작되자, 와그너 시장은 우선 오찬에 참석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전문을 받았다고 말하며, 그 중 대표적인 전문 하나를 선택해 읽었다.

 “와그너 시장님, 본인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뉴욕에 있지 못하게 되어 뉴욕 시가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베푸는 환영 오찬에 참석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본인이 이승만 대통령을 매우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추구하는 것은 위대한 대의이며, 그분은 자유세계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분의 애국심과 불굴의 의지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행사에 참석하지 못함을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드림.”

 점심 식사 후, 이승만 대통령은 참석자들에게 간략하게 연설했다.

 “오직, 힘으로 공산침략자들의 무릎을 꿇게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힘으로만 우리는 공산분자들을 격퇴하는 데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공산주의자들과 투쟁할 것을 호소합니다. 만약 누구든 평화회담이나 휴전으로 한반도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거든, 그런 자에게 속지 말라고 여러분께 말해 두고자 합니다.”

 행사에는 밴 플리트(Van Fleet, 1892~1992) 전 주한 유엔군사령관과 윌리엄 딘(William Dean, 1899~1981) 소장 등 6·25전쟁의 영웅들이 참석했다. 오찬 연설에서 이 대통령은 특히 미 보병 제24사단장으로 6·25전쟁에서 공산군의 포로(1950.8.25~1953.9.4)가 됐다가 전후 포로 교환 시 석방된 딘 소장의 노고를 치하했다.

 잠시 전설적인 종군 여기자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가 그녀의 저술 ‘War in Korea’(1951, 국내에서 2009년 ‘자유를 위한 희생’이란 제목으로 번역출간)에서 기록해둔 딘 장군의 활약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딘 장군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친절하고 훌륭한 군인 중 한 명이다. 6·25전쟁 초 그가 행한 용감한 행동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사단장인 그는 몸소 탱크 5대를 인솔하여 화염에 싸인 바리케이드를 뚫고 옛 전우인 미 육군 제19 보병연대장 멜로이(Guy S. Meloy, 1903~1968, 주한 미 제8군사령관으로 1961~1963년 기간 한국 근무)를 구하고, 직접 바주카포를 쏘아 적의 탱크를 파괴했다. 또한 그는 부상을 당하고도 대전이 적에게 포위되어 미군의 방어가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자, 패잔병을 모아 필사의 탈주를 시도했다.”

 이후 딘 소장은 3년 이상 북한에서 포로생활을 했으나, 미국 정부는 그에게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이어 와그너 시장이 이 대통령을 위한 축배를 제안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위하여, 세계의 위대한 시민을 위하여, 용기와 지도력이 생동하는 상징을 위하여, 그리고 이 하나의 지구촌에서 우리의 동맹,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인 이승만 박사를 위하여!”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와그너 시장과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를 위하여!”

 ▲컬럼비아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 수여

 이승만 대통령은 이날(8월 2일) 오후 4시 부부동반으로 개교 200주년을 맞은 컬럼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을 찾았다. 국빈방문 기간 중 2번째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 대통령은 7월 30일,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욕에 소재한 컬럼비아 대학은 미 동부 명문대학(Ivy League : 하버드·예일·펜실베이니아·프린스턴·컬럼비아·브라운·다트머스·코넬 등 8개 대학)이며, 하버드(1636), 윌리엄·매리 윌리엄(1693), 예일(1701), 프린스턴(1746) 대학에 이어 미국에서 5번째로 역사가 오래 된 대학이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3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대학이며, 현재 세계 3위의 부자 워런 버핏의 출신교이기도 하다. 참고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53년까지 컬럼비아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도착하자, 대학 교정에는 총장 대리 이하 많은 교직원이 도열해 있었다. 학위수여식은 마침 그레이슨 커크(Grayson Louis Kirk, 1903~1997) 총장이 출장 중이어서 총장 대리가 주재했다.

 총장 대리의 대통령 소개 및 학위수여식에 이어, 이 대통령은 준비해간 기념사를 읽지 않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즉흥 연설을 했다.

 “우리는 여전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있습니다. 적은 모든 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으며, 우리는 한걸음씩 양보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자유국가들의 챔피언이자 리더인 미국 정부가 지도적인 위치에 서서 자유세계를 승리로 이끌지 않고도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생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미국의 도움이 없이는 자유 대한, 자유 중국 그리고 자유 유럽도 없는 것입니다.

 아시아를 구하는 데 일조해주시오. 이것이 여러분에게 하는 나의 호소입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위해 싸우는 혁명가들을 격려해야만 합니다. 그들을 저버리지 말라고 간절히 바랍니다. 이들을 버리는 것은 한국, 중국, 기타 여러 나라뿐만이 아니라 미국 자신에게도 재앙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이 전면에 나서서 세계의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들을 해방과 자유로 인도해 주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