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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민주와 참여독재

淸山에 2012. 11. 28. 04:46

 

 

 

 

 

유신민주와 참여독재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박정희의 유신은 민주적이었지만 노무현의 참여는 독재적이었다.

최성재     
 
 

 민주화 지수(Polity Ⅳ, -10 ~ +10의 단계에서 +6 이상이면 민주국가로 분류)에 따르면, 민주국가가 1810년까지는 전 세계에 단 한 나라도 없었지만, 1989년 유럽의 공산권이 무너진 후 폭증하여 2010년 현재 약 90개국이나 된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던 때는 어땠을까. 당시에 민주국가는 전 세계에 30여 개국밖에 없었다. 한국은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민주화 지수가 +3으로 준(準) 민주국가에 속했지만(드골의 프랑스가 +5), 1973년부터 1980년 사이에 -8로 떨어졌다. 세계적으로 1970년대에는 독재국가가 부쩍 늘어났다. 1960년에 독재국가의 숫자는 약 40이었는데, 1979년에는 80을 웃돌았다.

 
이러한 세계적 조류는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월남을 손절매하기로 무언의 약속을 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1972). 아니나 다를까, 1975년 월맹이 키신저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파리평화협정의 이지스 방패 뒤에 탱크와 대포를 숨기고 쳐들어가서 미군이 철수한 월남을 어린애 팔 비틀 듯 요절냈다. 1970년대는 공산권의 이념과 폭력이 승승장구했다. 공산독재에 대항하여 국론을 통일시킨다는 명목으로 자유진영에서도 권위주의 국가 또는 준 민주국가에서 독재국가로 후퇴한 나라가 삽시간에 늘어났던 것이다.

 
한국과 비슷한 발전단계를 밟고 있던 자유중국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줄곧 비상계엄령 아래 있었기 때문에(민주화 지수 -8 ~ -7) 한국과 같은 선거와 언론의 자유는 언감생심이었고, 1960년대만 해도 한국보다 두세 배 잘 살았던 필리핀도 1970년대는 민주화 지수가 -9로 곤두박질쳤다. 신흥공업국으로 한국과 같은 반열에 있던 싱가포르는 1965년 독립 후 지금까지 줄곧 민주화 지수가 -2로 권위주의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동맹의 한 축을 이뤘던 인도네시아에서는 쿠데타와 내전이 끊이지 않았거니와 1960년대 후반부터 30년 동안 민주화 지수 -7을 기록했다. 언제 공산화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현상이었다. 1970년대는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경제가 낙후되고 정치가 안정되지 못한 나라들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 스페인은 1945년부터 프랑코가 사망하는 1975년까지 민주화 지수가 -7이었다. 국내 공산당과 소련의 세력이 합작해서 지속적으로 공산화를 획책했던 그리스도 1960년대 말부터 1975년까지 민주화 지수가 -7이었다.

 
한편, 월맹의 성공에 고무된 김일성은 당시만 해도 한국에 비해 우월했던 무기와 인민군의 사기를 믿고 무장간첩을 대거 남파했다. 청와대를 직접 노리기도 했고 이승복 어린이가 살았던 강원도의 밤을 지배하기도 했다. 게다가 박정희는 공화당 출신이라고 철석같이 믿었건만, 닉슨이 국군 5개 사단 이상의 화력을 지닌 미군 1개 사단을 일방적으로 철수하기도 했다(1971). 누가 봐도 당시는 국가 안보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준전시 상황이었다. 이제 겨우 가발이나 합판, 스웨터를 팔아 입에 풀칠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가 자식을 중학교에 보낼 수 있어서 감개무량해 하고 있는데, 독재자 김일성은 일제가 물려 준 공장과 발전소와 소련이 이전 해준 기술로 미군만 물러나면 언제든지 한국을 접수할 능력을 갖추었다.

 
박정희는 동남아시아나 중남미, 심지어 유럽의 스페인과 그리스와도 차원이 다른 장대한 계획을 세웠다. 10년 안에 경제자립과 자주국방을 동시에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에 수출 100억 달러! 무엇으로? 가발로, 합판으로, 스웨터로? 아니! 철강으로, 석유화학제품으로, 선박으로, 자동차로, 전자제품으로! 그건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장풍으로 산 같은 바위를 날려 보내려는 황당무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국민은 2번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의 초과달성을 보고 박정희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국민들은 ‘싸우면서 일하자!’는 유신헌법을 민주적 절차에 따라(군대는 조금 달랐겠지만), 91.9% 투표율에 91.5%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100년에 걸쳐 이룰까 말까 하는 중화학공업을 10년 만에 꽃 피웠다. 그것도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무기 생산 위주에 자급자족형이었던 공산권의 중화학공업과 달리, 박정희는 내수와 수출을 동시에 겨냥하여 양과 질 양쪽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 한국이 제조업 세계 5위권에 진입한 것은 거의 유신체제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는 국민 총동원의 유신체제로 민주화 지수를 뚝 떨어뜨렸지만, 이것도 딴 나라와는 판이하다. 무엇보다 정적을 죽이지 않았다. 야당의 발을 묶은 적은 있지만 죽인 적은 없다. 한 명도! 수천 명씩 비행기에서 떨어뜨려 죽인 아르헨티나나 칠레와는 전혀 다르다. 인도네시아에선 수십만 명을 죽였다. 대만? 장개석은 대륙에서 섬으로 본거지를 옮기면서 2만 명 이상을 죽였다. 또한 박정희는 개인의 경제활동과 교육과 사회생활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독재는 말할 것도 없고 신흥공업국과 비교해도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무척 너그러웠다. 민주와 독재는 상대적 개념이므로 당시 세계적 정세와 한반도 정세 그리고 민도(民度)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면, 박정희의 유신은 독재가 아니라 민주였다.

 
노무현은 어땠는가. 당시에는 이미 한국이 1988년 어떤 나라보다 먼저 민주화하고 나서 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치른 후, 1989년 마침내 유럽의 공산권이 여리고성이 무너지듯이 와르르 무너진 지도, 전 세계가 민주화 열풍에 휩싸인 지도 10년이 더 지났기 때문에 한국이 자유민주를 실천하고 내실화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어땠는가. 언론탄압이 그보다 노골적일 수 없었다. 김정일 독재에 대해서 바른 소리를 하던 조선과 동아는 홍위병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했다. 화형 당했다. 대통령이 기자실을 폐쇄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는 북한의 독재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 안 했다. 심지어 한국의 자유통일을 가로막고 자국민 3천만 명을 말 그대로 때려죽인 모택동을 존경한다고 고백했다. 독재자 김정일이 노벨평화상 공작금으로 핵실험을 단행하자,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고 ‘일 리가 있다!’고 두둔했다.

 

노무현은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킨다며, 대의 민주주의에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를 가미한다며, 친북좌파 시민단체에 치외법권을 부여했다. 헌법의 최고 수문장으로서 선거법을 어겨 한 동안 바깥출입도 못했다. 여당이 거품과 욕설과 근육으로 국회를 접수하는 걸 참여민주라며 흐뭇해했다. 방송과 인터넷이 선전선동하는 것을 참여민주라 자랑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자살로 몰아넣기도 했다. 동지들 덕분에, 깽판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되자, 독재자의 독재자 김정일에게 더욱 굽실거리다가 임기를 불과 몇 개월 앞두고 서해 5도를 사실상 김정일에게 바쳤다. 각종 떼법 위원회를 만들어 일방적으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수치의 역사로 뒤집었다. 반기업정서를 확산시켜 수출 많이 하고 흑자를 많이 내는 대기업일수록 손가락질 받게 만들었다. 과연 누가 민주였고 누가 독재였던가.

 (2012. 1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