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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街戰(시가전)이 치열한 알레포 이야기

淸山에 2012. 8. 9. 05:40

 

 

 

 

 

市街戰(시가전)이 치열한 알레포 이야기 

 
趙甲濟    


 
 시리아에는 세계 最古 도시를 다투는 곳이 두 군데 있다. 수도인 다마스쿠스와 북부의 경제 중심지 알레포이다. 2007년 초 나는 시리아를 여행하면서 두 도시를 구경하였다. 지금 두 도시는 內戰의 본 무대가 되었다. 시리아는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많은 곳인데, 포격과 폭격으로 부서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알레포의 한 고층 호텔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거대한 회색 시가지가 눈 앞에 펼쳐졌다. 아파트와 단독주택 할 것 없이 지붕마다 위성TV 수신용 접시들이 密林을 이루고 있었다. 아파트도 통합 수신 시스템이 없는 듯 각호마다 따로 접시를 두고 있었다. 시리아 사람들은 시리아 정부에 비판적인 미국의 CNN, 영국의 BBC도 마음대로 볼 수 있었다.

 

시리아는 이란과 함께 중동의 대표적인 親北反美국가이다.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등 무기를 사들이고 있다. 시리아는 인접국인 레바논의 정치에 개입하고 테러단체를 지원하고 있다. 몇년 전 사망한 아사드 대통령의 절대권력은 아들에게 넘어갔다. 여러 가지 점에서 북한과 비교된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며칠만 있으면 이 나라를 북한과 비교하는 것은 모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북한 평양의 屋上에 위성TV용 접시의 숲이 있는가? 다마스쿠스 시장과 같은 시끌벅적한 시장이 있는가? 일반 국민들이 명랑하고 친절한가? 외국인 투자가 허용되는가?

2007년 통계에 따르면 시리아와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0 달러 수준으로 비슷하게 나와 있었다. 이 또한 시리아에 대한 모독이다. 시리아의 거리는 자동차 홍수이다. 그 30%가 한국 자동차라고 한다. 굶는 사람이 없다. 당시엔 공개적으로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한 감옥에 가지 않았다. 북한의 실질적인 1인당 소득은 300 달러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2007년엔  시리아를 찾는 한국 여행객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 나라는 북한과 수교하고 한국 공관은 없다. 한국 여행객들이 시리아에서 여권을 잃어버리면 인접한 레바논 대사관으로 사람을 보내 여행증명서를 만들어 와야 출국할 수 있다. 이런 불편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시리아를 찾고 있었다. 인류문명의 한 기원지인 이곳에는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 문명의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로마 유적은 이탈리아에 있는 것들보다 더 장려하다.

 

무엇보다도 시리아 사람들의 인상이 좋았다. 특히 외국인들에 대해서 친절하다.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독재국가임엔 틀림이 없으나 김정일式의 인간말살형 독재는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버지 아사드가 김일성을 만나고 난 뒤부터 개인숭배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도 그랬다고 한다. 여러 나라를 망친 것이 김일성이다.

 

그 시리아가 불타고 있다. 아사드 2대의 독재와 시아파-수니파의 해묵은 갈등이 쌓아두었던 인화물질에 중동 혁명의 불씨가 떨어지면서 대폭발한 것이다. 평온하던 당시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의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그때 썼던 알레포 기행문을 아래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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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最古 도시 알레포 시장에서 만난 한국  
 
 
 '시어머니를 위해 선물 합시다'라는 푯말이 보였다. 이런 商魂이 이 도시를 전란과 지진속에서 지켜냈다. 
趙甲濟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시리아는 지중해와 동양(페르샤,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즉 동과 서, 이집트-아라비아와 그리스 터키, 즉과 남과 북의 십자로상에 있었다. 이 십자로를 따라 민족과 문화가 오고가면서 충돌, 융합하였다. 그리하여 시리아를 요람으로 하여 33개 문명이 꽃을 피웠다. 문명은 피었지만 사람들은 죽어나갔다. 수많은 전쟁, 정복, 반란, 흥망이 연출된 무대였다.

 


사진 : 알레포의 8000년 역사가 그려낸 드라마를 지켜본 언덕 위 城砦(성채).

 

시리아의 남북 2대 도시는 남쪽의 다마스커스와 북쪽의 알레포이다. 거리는 서울-부산과 비슷한 350km이다. 두 도시는 ‘중단 없이 거주한 세계에서 가장 오랜 도시’라는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이다. 대략 8000년의 역사이다. 다마스커스를 출발하여 북상한, 尙美會 여행단을 태운 버스는 이틀만에 드디어 알레포로 들어갔다. 인구 약300만 명인 이 도시는 3800년 전 기록에 이미 동서, 남북무역으로 번성한 상업도시였다. 알레포는 기독교 인구가 약30%나 된다. 20세기초 터키에서 추방된 아르메니아 등 기독교도들이 이 도시로 피란 왔기 때문이다. 소련 제국이 붕괴된 이후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쪽으로부터 상인들이 옛날처럼 이 도시를 오고가면서 장사를 하고 있다.

 

시리아와 신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과 서의 極端이었다. 동의 신라에서 출발한 실크 로드와 스텝 루트가 지중해의 東岸인 시리아에서 끝난다. 이 무역로를 따라 신라와 시리아 사이에 물건과 사람이 오고갔음을 실증하는 것이 경주 皇南大塚(98호분)의 南墳에서 출토된 11점의 로만 글라스, 즉 유리잔들이다. 일본의 유명한 유리공예가 요시미즈 쓰네오(由水常雄)는 이 로만 글라스를 분석하고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한 395년부터 西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는 476년 사이에 시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이 사이 시리아는 東로마제국(나중에 비잔틴 제국이라 불린다) 治下에 있었다. 요시미즈씨는 이 기간에 신라와 로마 사이에 초원의 길을 따라서 문화와 인간의 교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시리아産 로만 글라스는 그 교류의 한 가지 물증일 뿐이다. 경주 계림로에서 출토한 黃金寶劍(황금보검)은 로마 영내이던 지금의 불가리아(당시는 트라키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요시미즈씨는 ‘로마文化王國新羅’라는 책도 썼다.


東로마 치하 시리아의 유리잔이 신라에 오게 된 경로는 시리아-黑海北岸-몽골초원-중국 북부-경주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라 출신인 한국인들이 비행기 편으로 대강 그 초원의 길 위를 날아와 지금 알레포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사진 : 알레포 성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식 접근로는 아랍 예술 전시장이기도 하다. 수많은 정복자들이 이 길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가거나 성앞에서 죽었다.


알레포에 대한 역사 기록은 기원 전 2000년 전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바빌론의 함무라비왕과 알레포왕이 협정을 맺어 20여개의 작은 왕국을 관할했다는 기록이 있다. 알레포는 아모르족의 왕국 얌카드의 수도였다. 예수 탄생 전 19세기 지금의 터키 지방에서 번성한 히타이족이 남하하여 알레포를 점령한다. 남쪽으로부터 이집트의 침략도 있었다. 서기 전 1200년 전엔 해양민족의 공격을 받았고, 아람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서기 전 854년부터는 아시리아 치하가 되었다. 그 뒤 알레포는 아람족, 아시리아, 칼데아족, 다시 아람족, 페르샤의 지배를 받다가 서기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군대에 점령됨으로써 그리스-로마문화권으로 들어간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알레포를 포함한 시리아와 터키, 페르샤 일대는 후계자의 한 명인 셀레쿠스 장군이 다스리게 되었다. 셀레쿠스 제국의 수도는 지금의 터키 도시 안티옥이었다. 시리아는 셀레쿠스 對 이집트를 인수한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프톨레미 제국 사이 쟁탈전의 무대가 되었다. 로마가 기원 전 1세기에 시리아를 점령하고 관할권이 기원 후 4세기부터 東로마 제국으로 넘어가면서 시리아는 기독교 문명도 흡수한다.

 

시리아 남쪽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은 가장 먼저 다마스커스와 알레포를 비롯한 시리아를 정복한다. 서기 636년의 일이었다.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한 움마야드 왕조가 동서양에 걸친 이슬람 대제국으로 팽창하게 된다. 100년 뒤 압바시드 왕조가 움마야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겼다. 10세기에 일시적으로 알레포는 비잔틴 제국 군대의 공격을 받아 점령되기도 했다. 이 무렵 대지진이 알레포를 파괴했다. 1124년 십자군이 알레포를 포위했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 알레포는 살라딘이 창건한, 이집트에 본부를 둔 아유비 왕조의 치하로 들어갔다.

 


사진 : 이 성채를 수백년간 점거하고 관리했던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紋章. 맘루크는 투르크 용병집단인데 모시던 왕을 몰아내고 왕조를 세워 중동 지역을 통치했다.

 

13세기 초 몽골에서 일어난 징기스칸이란 대폭풍은 1260년 알레포를 덮친다. 이집트에서 달려온 맘루크(투르크 노예용병) 기병은 몽골기마군단을 이스라엘의 아인 잘루트에서 격파하고 알레포를 수복했다. 아유비 왕조는 맘루크 왕조로 교체되고 1516년 오스만 투르크에 망할 때까지 약 260년간 알레포 등 시리아를 통치했다. 그 사이 알레포는 또 한번 몽골기마 군단의 말발굽에 짓밟힌다.

 

1400년 티무르의 기마군단이 알레포를 3일만에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뒤 기술자들만 골라 그들의 수도 사마라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소재)로 끌고 갔다. 티무르는 징기스칸의 후예를 자칭했다. 그의 치하에 티무르 제국은 중앙아시아, 이란, 인도북부, 지금의 터키, 시리아 일대를 점령하거나 공격했다. 中世 역사상 가장 큰 파괴와 학살을 자행했다.


동서남북 문명의 십자로에 있었던 알레포는 이런 전쟁과 지진속에서도 불사조처럼 일어났다. 무역의 힘이었다. 돈의 유혹이었다. 15세기엔 베니스 상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왔다. 1919년 알레포는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해방되자마자 곧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오스만 시절 알레포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베니스가 영사관을 따로 둘 정도로 중동의 가장 중요한 무역중심지였다.


이상의 드라마를 지켜본 것이 알레포 중심부 언덕 위에 세워진 알레포 성이었다. 도시의 역사만큼 긴 것이 이 성이다. 636년 아랍군대가 계교를 써서 이 성을 비잔틴 군대로부터 탈취한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성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성은 33m 높이의 원추형 언덕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더 높아 보인다. 너비 32m, 깊이 22m의 해자가 패여 있다. 해자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높이는 55m이다. 이 성으로 들어가는 계단식 입구는 아랍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조각품으로 장식되었다. 성안엔 궁전터, 모스크, 저수지, 감옥 등 많은 부대시설이 있다.

 


사진 : '시어머니를 위해 선물하세요'라고 쓴 선전문을 들고 있는 알레포 시장 상인. 이런 商魂이 戰亂과 지진속에서도 이 도시를 유지한 힘이었다.

 

알레포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8000년에 걸친 알레포의 도시 생명력을 짐작케 해주는 것은 성 바로 바깥에 있는 수크라고 불리는 시장이다. 카피트, 면직물들을 많이 판다. 한국 관광객들이 벌써 길을 내어놓았다. 상인들이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우리를 끌어당겼다. 한 상점에선 한글로 “시어머니에게 선물합시다”란 푯말을 내어놓았다. 상인들의 이런 힘이 바로 이 도시를 戰禍와 지진 속에서 지탱해왔을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國富論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오늘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는 것은 정육점과 빵 만드는 사람들의 好意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