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살인사건 현장 제주 올레길 1코스, 女기자 직접 걸어보니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지난 23일 제주 올레길에서 살해된 40대 여성 여행객 강모씨의 시신이 올레길과 약 18㎞ 떨어진 도로의 버스정류장에서 발견됐다. 용의자는 이날 새벽 긴급 체포됐다. ‘자연과 치유의 길’로 알려진 올레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튿날 만 스물 일곱 살 여기자 혼자 제주로 향했다. 강씨가 홀로 제주를 찾아 걸었던, 걷고 싶어했던, 끝내 다 걷지 못했던 올레길 1코스를 똑같이 걸어보기로 했다.
■ 생애 두번째 올레길, 밀리터리 룩을 입고 가다
올레길은 지난해 여름에 이어 두번째였다. 등산복 대신 밀리터리 무늬 반바지를 꺼내 들었다. “낯선 사람 만나면 이게 좀 더 세 보이지 않을까?” 어설프게라도 강해 보이고 싶었다.
꼭두새벽에 김포공항에 도착, 새벽 6시 50분 비행기를 탔다. 잠을 거의 못 잤지만 긴장 때문인지 피곤하지 않았다. ‘살인사건이 발생한 올레길을 혼자 돌아봐야 하다니…’ 지난해 여름에 다녀본 외딴 숲길과 바닷길이 자꾸 떠올랐다. 그때는 어머니와 함께 갔었다. 괴한을 만나면 지을 사나운 표정을 연습하는 동안 비행기는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본 제주도. 괴한을 만나면 지을 사나운 표정을 연습하면서 갔다.
제주의 하늘은 쾌청했다. 아열대 기후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즐비어 서 있는 거리 풍경은 지극히 평온해 보였다. 공항 앞에 줄지어 선 예닐곱 대의 택시 중에서 맨 앞에 있는 택시를 잡아탔다.
올레길 1코스 입구에 내려달라고 하자 “안 무서우세요?‘란 대답이 돌아왔다. “어제도 육지에서 온 기자를 태웠어요. 무슨 발표 간다더군요. 제주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제주도를 삼다도(三多島)라고 하지만 3무(無)의 섬이라고 하잖아요.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담장 없고. 그랬던 섬이었는데…”
택시기사 장명언씨(65)는 대대로 제주에서만 산 토박이라고 했다. 장씨는 “올레길이 생기니까 그래도 시골 동네에 사람이 들어오고, 게스트하우스도 생기고, 하다못해 동네 구멍가게에서 생수라도 한 병 사가잖아요. 그래서 걱정이요. 길 때문에 생긴 사건은 아닐텐데…”

지난 23일 피살된 여행객 강모씨의 절단된 손목이 발견된 만장굴 입구 버스정류장
50분쯤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 성산읍 시흥리. 주변은 돌담으로 둘러친 밭 뿐이었다. 마을 앞편에는 동산, 뒤편에는 먼발치 바다가 보였다. 여행객은 아무도 없었다. “막상 도착하니 꺼림칙하네요. 부디 조심하고 돌아가세요.” 택시기사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사라졌다.
올레길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
카메라 장비를 든 남성 두 명이 다가왔다. 방송국 취재진이었다. 배낭에 티셔츠, 밀리터리 반바지에 운동화를 입고 나타난 내가 관광객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기자라는 사실을 알자 맥풀린 표정이 됐다.
그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재차 말을 걸었다. “저희 오랫동안 여기서 기다렸는데 정말 사람이 아무도 안 지나가더라구요. 그래서 죄송한데 걷는 모습 발 부분만 촬영할 수 없을까요?” 이미 올레길 한 바퀴를 다 돌았지만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촬영을 도왔다. 그리고 진짜 혼자가 됐다.
올레길1코스는 마을 시흥리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 발걸음 시작한 지 10분…너무나 빨리 도착한 현장
올레길은 자동차 한 대가 다닐만한 구불구불한 포장도로로 시작됐다. 길 주변은 온통 원색이었다. 양 옆으로 펼쳐진 밭에는 붉은색 흙과 연두색 새순이 펼쳐졌다. 여기에 검은색 현무암 돌담이 바둑판처럼 경계를 지었다. 길가에는 보라색, 노란색 풀꽃들이 줄지어 피었고, 나비가 계속 날아다녔다. 두려움은 멀어져갔다.
다만 더웠다. 그늘 하나 없는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이 이어졌다. 10분을 걸으니 등이 축축하게 젖었고, 아껴 먹으리라 다짐했던 보리차를 몇 번이나 들이켰다.
그늘 없는 완만한 오르막길이 꾸준히 이어지는 올레길
올레길 주변의 밭. 콩과 밭벼, 고구마 등을 심었다.
관광객 피살 사건 후 (사)제주올레는 안전을 위해 올레길 여행은 아침 9시 이후, 여럿이 동행할 것을 권했다. 올레길 입구에서 약 1㎞ 떨어진 안내소도 9시부터 문을 연다. 그러나 상당수 올레꾼들은 날씨 때문에라도 이른 새벽에 걷는 것을 선호하겠다 싶었다.
안내소가 있는 곳부터 길은 마을을 벗어나 ‘말미오름’이라 불리는 동산으로 접어든다. 경찰 순찰차가 한 대 지나갔다. 숨진 강씨가 마지막으로 목격됐다는 정자가 나타났다. 지금부터는 산길이다. 눈에 힘을 주고 심호흡을 했다.
올레길 입구로부터 약 1㎞ 떨어졌을 무렵 경찰 순찰차 한 대가 내려오고 있다.
숨진 여성 관광객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정자. 이 정자를 기점으로 숲길이 시작된다.
드디어 시작된 오르막길
숲길이 시작된 지 1분, 용의자 강씨가 혼자 여행하는 강씨를 처음 맞닥뜨렸다는 현장에 도착했다. 숲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완만한 오르막길. 운동기구 4개. 본격적인 등산로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숨진 피해 여성은 올레길이 본격 시작되기도 전에 악당을 만나버렸다.
관광객 강씨가 살인 피의자 강씨와 맞닥뜨린 현장. 의자와 운동시설이 있다. 오르막 계단을 다 오르고 나면 바로 이 장소다.
■ 아름답고 고독한 혼자 걷는 숲길 … “과연 이런 곳에 CCTV를 달 수 있을까”
사건 현장에서 10분 가량 더 걷자 본격적인 등산길이 시작됐다. 말미오름의 능선은 완만하고 키 작은 나무들이 많았다. 그늘은 별로 없었지만 길은 경사가 가파르지 않고 바위도 거의 없이 폭신폭신해 걷기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의 전경을 보면서 걸을 수 있었다. 붉고 푸른 들판이 한 눈에 펼쳐졌다. 구름이 휘감긴 성산리 일출봉과 바다도 보였다.
경치에 탄성이 나왔지만, 그만큼 마을과 멀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긴장됐다. 도망가기 힘든 이런 외진 곳에서 범죄가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혼자 더위에 지쳐 쓰러지거나 사고를 당할 위험이 더 걱정스러워졌다. 이런 고립감은 캠핑이나 등산 등 도시를 떠난 이상 어디에서나 각오해야 할 것이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친구들과 카카오톡 채팅을 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깊숙한 숲길인데도 카카오톡은 잘 터졌다. 친구들과 채팅하면서 걸으니 무섭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예쁜 풍경들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기쁨도 있었다. 그렇게 사진찍다, 카톡하다, 구경하다를 되풀이하며 산만하게 걷다가 스텝이 꼬여 넘어졌다. 그러니까, 산에서는 이런 것들을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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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숲길. 여느 등산로와 다르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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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나무가 많은 말미오름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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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오름 중턱 능선에서 내려다 본 마을 풍경. 멀리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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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만한 내리막길. 이 사진을 찍고 나서 넘어졌다. |
살인사건 이후 올레길 관광객 안전 대책으로 폐쇄회로(CC)TV 설치 등이 거론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숲길에 CCTV를 설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키 작은 나무와 울타리 뿐인 길에 설치할 곳도 없거니와, 나무에 CCTV를 주렁주렁 매달면 보기 흉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악산, 지리산, 북한산보다 훨씬 경사가 완만하고 바위도 적은 야산에 CCTV를 설치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느낌이다. 잠시 앉아 쉬는 동안 “길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인데…”라는 친구의 카톡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곧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동시에 그늘이 거의 없는 말미오름 산길에 갑작스레 키 큰 나무들이 즐비하면서 울창한 숲이 시작됐다. 내리막은 오르막보다 훨씬 조심해야 한다. 한 번 넘어지기도 했다. 저 모퉁이를 돌아서면 뭐가 나올까. 갑자기 숲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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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나타난 어쩐지 나쁜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숲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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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한복판을 막고 풀을 뜯고 있는 소들 |
소가 나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마리. 송아지 한 마리 빼고는 제법 튼실한 뿔이 달린 황소.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소 일곱 마리가 길을 막고 풀을 뜯고 있었다. 그 중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소의 눈은 예쁘다는데, 지금 이 소는 “여기는 내 구역인데,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듯 했다. 다리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저 소떼가 흥분해 덤벼든다면 무사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통과하지? 혼자서 여행온 것이 가장 막막해지는 순간이었다.
카톡에 물어봤지만 별다른 대답이 오지 않았다. 대장 격으로 보이는 소가 다른 데를 보는 순간, 길이 아닌 숲으로 돌아서 가기로 했다. 맨다리가 풀에 긁혀 피가 맺혔다. ‘제길 소가 밀리터리 바지 보고 쫄 것도 아니고, 긴바지 입을 걸’. 하지만 우회는 성공. 가슴을 쓸어내리려는데, 소떼가 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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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소떼. 길을 돌아 소떼를 통과한 뒤 안전한 장소에서 찍었다. |
우마왕이 지배하는 화염산이 여기였구나. 어쩐지 엄청 덥더라니. “대체 사람이 다니는 길가에 누가 소를 풀어놓은거야”.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사람이 다니는 길에 소를 풀어놓은 것이 아니라, 소가 풀을 뜯는 공간에 길이 나 버린 것일 수도 있다.
올레길은 명승지 뿐 아니라 제주의 평범한 마을과 산길, 바닷가를 골고루 잇는 코스로 구성돼 있다. 여행객이 제주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여행객과 현지인의 공존이란 말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여행객의 안전과 소 주인의 경제활동 권리가 충돌할 때에는 어찌 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안전하게 관리된 곳만을 걷자니, 그것은 올레길의 취지와 동떨어진다.
두번째에도 처음과 같은 우회 전략으로 돌파했다. 다행히 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혼자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의 부담감 만큼, 혼자 위험을 벗어났다는 기쁨이 컸다.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친구들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우마왕이 지배하는 소떼지옥을 통과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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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이 끊겼지만, 전화는 터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메밀밭. |
메시지가 안 간다. 카카오톡이 끊겼다. 소떼를 통과하니 메밀밭. 나와 메밀 뿐인 공간이었지만, 카카오톡이 끊어지니 세상으로부터 고립됐다는 느낌이 다시 몰려왔다. 소떼와 마주쳤을 때와는 또 다른 먹먹함이 가슴을 짓누르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린다. 회사 선배가 출장간 줄 모르고 일 때문에 걸어온 전화였다. 일 전화조차 반가웠다. ‘카톡은 끊어져도 전화는 안 끊기는구나. 대한민국 통신기술 만세!’
연두색 메밀밭 풍경이 다시 아름답게 보였다.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메밀밭을 벗어나 다시 숲길로 들어서려는 순간 강풍이 불면서 길 옆 덤불에서 우드득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뛰다시피 걸어 지나쳤다. 심장이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여행객 강씨가 자신을 뒤따라온 마을주민 강씨에게 참혹하게 변을 당한 현장이 바로 이 부근이다. 소보다 사람이 훨씬 무섭다.
■ 마음까지 씻겨져 나가는 바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오전 11시 40분.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목덜미가 더욱 뜨거워졌다. 선크림을 발라도 발라도 땀과 함께 흘러내려서 포기하고 걷던 차였다. 메밀밭을 벗어날 무렵,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트랙터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짐칸에 주황색 농약탱크를 담은 트럭이 한 대 나타났다.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과 사람이 나타났다는 두려움. 두 감정이 교차했다. 트럭에는 70대 할머니·할아버지가 타고 있었다. 할머니가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낯선 차를 타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무더위에 더 이상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트럭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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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길의 절반은 트럭을 타고 편안하게 내려왔다. |
“우리는 콩밭에 농약 주고 돌아가는 길이야. 자식들은 너이(넷) 있는데 다 육지 나가 살고, 우리 둘이만 저 아래 마을 사는데 아가씨는 어디로 가나? 우리집도 올레길 1코스 중간에 있는데 편한 데 내려줄게. 그런데 물은 제대로 챙기고 다녀?”
말미오름 아래에 있는 종달리 마을에 산다고 했다.
“며칠 전에도 젊은 부부가 어린 애들 데리고 여기 왔는데, 애들은 서너살 정도. 애들을 업고 내려오는데, 징징대고 아주 힘들어보이는 거야. 그 사람들도 태워줬어요. 자식을 어릴 때부터 강하게 기르는 건 이해가 가겠는데 그래도 애들은 저 산 타기 힘들지.”
다리에 난 풀독 상처를 감추고 싶어졌다. 여행지에서 사고를 당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행자 스스로가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다. 올레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밀려왔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할머니·할아버지에게 마을 이야기를 제법 들을 수 있었다. 말미오름 근처 주민들은 주로 콩과 밭벼, 고구마를 재배한다. 지금 아무것도 심어놓지 않은 땅은 곧 당근을 심기 위해 갈아둔 밭이다. 제주도에는 바람이 심해서 농작물이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밭의 경계에도 돌담을 쌓는다. 메밀밭 전에 나타난 소는 동네 사람이 키우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우근민 현 제주지사의 형이라고 했다. 네? 정말요?
우근민 지사의 형님이라는 이 할아버지는 마을 한복판에 나를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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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근호 할아버지의 트럭과 종달리 마을. |
‘이제는 혼자 걸어도 안심’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걸어가려는데, 밴 한 대가 멈춰섰다. ‘제주올레길탐사단’에서 나온 직원들이었다. “혼자 다니는 여성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지금 올레길 1코스 다니시면 안 되는데…” 기자 신분을 밝히고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들은 올레길 1코스가 폐쇄됐다고 알려주고 떠났다. 그제서야 휴대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보니 8분 전 기사가 떠 있었다.
마을길은 성산읍 해안도로와 곧장 연결돼 있었다. 날씨가 맑아서 검은빛 현무암과 옥빛 바다 색깔이 선명하게 대비됐다. 자전거로 해안도로를 일주하는 여행객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해안에는 한치를 말리는 어민들이 보였고, 횟집이나 카페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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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읍 해안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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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민들이 길가에 한치를 널어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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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에서 찍은 올레길 앞바다 |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시원했다. 눈 앞에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에 땀은 물론 마음까지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제주 올레길 여행은 흔히‘자연과 함께 하는 치유와 명상의 여행’으로 알려져 있다. 바꿔 말하면 올레길 여행은 떠나려는 사람은 치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그러한 여행객이 올레길 입구에서 희생됐다는 사실은 더욱 아픈 얘기다.
■ 올레길 마을 사람들과 여행객
낮 12시 30분. 코스의 절반 가량 걸었을 무렵,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날씨는 더욱 뜨거워지는데 계속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날 저녁 비행기를 타기 전 취재 자료를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다. 택시비로 현금을 다 써 버렸는데, 이 지역 콜택시는 카드결제가 되지 않았다. 버스를 타야만 하는데, 아무리 걸어도 정류장이 보이지 않았다.
해변가에 있는 카페에 들러 길을 물었다. 종달리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복잡했다. 어촌계와 정미소, 하수공사장과 노인정과 마을회관, 구멍가게 4개와 느티나무 쉼터 2개, 초등학교 한 곳을 지나자 마침내 정류장이 나왔다. 여러 주민들에게 길을 물어봤는데 하나같이 똑같은 소리를 했다. “혼자 다니지 마. TV보니 너무 무서워.” “아이구 혼자 다니면 어떡해. 조심해.” 가는 곳마다 걱정이 이어졌다.
올레길 1코스의 전체 길이는 15.6km. 입구에서부터 해안도로가 처음 나타나는 곳까지가 3분의 1 가량 차지한다. 말미오름길은 전체 코스의 5분의 1 가량이다. 작년에 갔던 6코스와 10코스 역시 고립감을 느낄 만한 산길이 20~30% 정도 차지했다. 혼자 해안도로를 걷는 것보다 여럿이 산길을 걷는 게 훨씬 안전할 수 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오면 어디를 가더라도 위험은 항상 따른다.
종달리에서 마을회관과 구멍가게, 학교를 지나는 동안 파출소나 소방서는 보지 못했다. 주민들이 산책도 하고, 소 풀도 뜯게 하는 '생활권'에서 살해당한 여행객 강씨 사건은 올레길의 문제가 아니라 농어촌 전반의 열악한 치안 인프라의 결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레길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올레길은 중도하차가 불가능하다. 코스 중간에 대중교통과 연결돼 있지 않아 끝까지 걷거나 콜택시를 불러야 한다. 반면 완주하려면 강한 체력이 필요하다. 산, 마을, 바다가 섞인 15.6km 중에서 자유롭게 아무 곳에서나 시작하고 아무 곳에서나 끝낼 수 있다면 올레길의 정신도 지키면서 여행자의 안전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스마트폰에서 뉴스를 검색하니 ‘CCTV’나 ‘올레길 1코스 전면폐쇄’, ‘올레길 안전대책’ 등의 뉴스가 잇따라 떴다. 숲길과 소떼와 히치하이킹과 바다가 떠올랐다. 범죄와는 단호히 싸우되,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 변을 당했다 하여, 혼자 여행하면서 얻을 수 있는 쾌감과 성취감이 지나치게 제한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레길 주민들도, 여행객들도 상처를 딛고 더욱 단단해지기를 바란다.
제주올레1코스 탐방 정리. 사단법인 제주올레 홈페이지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