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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헌 出馬에 개입한 도상태의 正體 (再錄)

淸山에 2012. 7. 19. 04:41

 

 

 

 

 

강종헌 出馬에 개입한 도상태의 正體 (再錄) 
 
 
 反국가단체 ‘한민통’ 출신…北에 南北철도 연결자금 전달하고, 南北공동선언 기념집회 연 ‘삼천리철도 이사장’
趙成豪(조갑제닷컴)    


 
 간첩출신 강종헌의 비례대표 출마에 개입하였다고 스스로 밝힌 都相太(도상태)는 反국가단체 '在日(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舊한민통)과 관련 있는 인물로  드러났다.
도상태는 1941년 生으로, 현재 일본에서 고속도로 교통안전시설의 개발 및 제조공사를 담당하는 ‘G테크노’ 대표 및 비영리법인(NPO)인 ‘삼천리철도’ 이사장으로 있다.

도상태는 국내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내 일부 左派(좌파)인사들과는 친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가 이끄는 삼천리철도는 南北철도연결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左派인사들과 협력, 경의선 복원에 참여하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도상태와 삼천리철도가 강종헌을 비롯한 左派세력과 연계된 점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左派세력과 연계된 삼천리철도

都 씨는 2000년 6ㆍ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직후인 2000년 9월30일 ‘삼천리철도 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삼천리철도 홈페이지(www.sanzenri.gr.jp)에 게재된 경력서(일종의 법인소개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설립 취지문이 나온다.
“우리는, 해외동포가 그 남북공동선언에 응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비무장지대의 철도건설을 해외동포의 손으로 완수하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1년 3월2일字 <한국일보>는 ‘경의선 복원공사 재일동포 모금운동’을 보도했다. 신문은 “재일동포 단체 ‘삼천리철도’는 1일부터 民團(注: 민단, 在日대한민국민단)ㆍ조총련 동포와 일본인을 대상으로 모금 운동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해(注: 2000년) 9월 아이치현의 民團ㆍ조총련 동포 20여명이 추진위원회를 만든 데 이어 최근 변호사와 공인회계사로 구성된 자금관리 단체를 구성했다”고 전했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북한 노동당 지령을 받는 조총련(在日本조선인총연합회)도 이 사업에 참여했다는 것이 된다.

삼천리철도는 2002년 3월20일과 2002년 12월5일, 제1차 남북철도 연결 자금을 각각 남측과 북측에 전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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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15선언 5주년 기념집회에 참석한 한상렬(上)과 2002년 참석한 임수경(下)
(출처: 삼천리철도 홈페이지)

 

 

삼천리철도는 또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매 6월마다 남북공동선언 기념집회를 가졌다. 2002년 6월16일 집회에는 임수경(1989년 불법 방북, 現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당선자)이 참석했었으며, 2004년 6월 집회에는 이화영(당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고진화(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도 참석했었다. 2005년 집회에는 2010년 무단 방북해 북한정권과 김정일을 옹호ㆍ찬양한 한상렬도 참석, 특별강연을 했었다.


과거 反국가단체 ‘한민통’ 前歷

도상태는 과거 한민통 활동 前歷(전력)이 있다. 都 씨는 1973년 소위 ‘金大中 납치사건’ 당시 김대중 구출운동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몸 담았던 한민통은 일본 內 민족통일협의회(민통협) 등 6개 단체가 1973년 8월15일 결성한 연합체이다. 1978년 대법원은 한민통이 국가보안법 폐지, 反韓 운동 등을 전개해 反국가단체로 판시했었다. (注: ‘한민통’, 1989년 ‘한통련’으로 개칭)

1980년 駐日(주일)한국 대사관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송부한 보고서 <조총련ㆍ한민통 일본 본부ㆍ金大中 관계>에는 한민통 결성 과정이 자세히 나와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71년 1월 배동호, 곽동의 등은 북괴 지령에 의거해, 한국 과학기술처에서 교토대학에 유학 중인 리동일에게 3000만 엔의 자금 제공을 전제로 미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교양하는 등 포섭공작을 진행했다. 同年 7월 民團 조직을 와해하고자 反民團 청년 학생을 동원, 民團 東京 본부를 습격, 유혈 난동이 일어나자 배동호, 김재화, 곽동의, 정재준, 김종충, 조활준, 김은택, 김군부 등이 民團에서 제명 또는 축출 당하자 親북괴세력으로 표출돼 非합법 투쟁으로 급선회했다. 1971년 1월경 新民黨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金大中(注: 前 대통령)이 訪日하자 배동호는 고양일 등을 통해 金大中에게 접근, 同人의 체류비, 여비를 지원하는 등 金大中과 교분을 다졌다. 1972년 10월11일 訪日한 金大中은 同年 10월17일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단념, 해외에서 全 동포들을 총집결시켜 정부 타도를 목표로 한 조직적 투쟁을 선언, 배동호, 곽동의, 김재화, 정재준, 조활준, 김종충 등 베트콩파 중심 인물들의 호응을 얻었다.”

보고서는 “한민통은 표면상으로는 反민단 투쟁 단체로 위장하고 있으나, 김대중의 구상에 의하여 결성되어 조총련 배후 조종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민통을 주도하는 곽동의는 북괴에서 교육을 받은 간첩이고, 배동호 역시 곽동의와 사상적으로 밀착한 용공분자”라고 규정했다. 또 “조총련과 연대 투쟁체제를 구축하고 북괴의 목적 사항 실행을 위해 각종 행사를 공동개최하는 등 대한민국 전복과 적화통일을 위해 공동투쟁을 전개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상 한민통을 북한과 조총련의 지령을 받는 從北단체로 본 것이다.


문익환과 訪北한 동행자에게 8000만원 지원

1989년 문익환의 불법 訪北(방북)을 조사했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수사발표문에도 도상태가 등장한다. 안기부 수사발표문은 문익환과 訪北에 동행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된 유원호를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88년 11월, 정경모를 적극 추종하는 前 한민통 동해지역 재정부장인 도상태로부터 ‘중원엔지니어링’ 설립비용으로 8000만원 등 자금을 지원받고, 한민통 조직과 깊은 연계를 맺어왔다.”

유원호는 한민통 출신 정경모에게 포섭된 것으로 드러났다. 안기부 수사발표문에는 유원호가 “1980년 9월 박병채를 통해 정경모를 알게된 이후부터 50여 회에 걸쳐 渡日(도일), 동경 시부야쿠에 있는 <씨알의 힘> 사무실 등에서 접촉, 그로부터 ‘친일ㆍ유산계급의 남쪽야당은 정통성이 없으므로 민중에 뿌리를 둔 혁명적 변혁이 필요하다’, ‘김일성은 장기집권자이나 항일투쟁을 한 민족주의자이다’라는 등 교양을 받고 이에 동조했음”이라고 되어있다.

정경모 역시 한민통의 곽동의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한민통 기관지 <민족시보>의 主筆(주필)을 지냈었다. 안기부 수사발표문에는 정경모가 김일성으로부터 “‘정경모 동지의 문필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등의 격려와 찬사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注: 정경모는 내부 불화로 1978년 한민통을 탈퇴했다)

도상태는 2005년 2월호 <월간중앙>에서 문익환 불법 訪北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문 목사를 전혀 알지 못했어요. 다만 친구 사이로 함께 사업을 하기도 했던 유원호 씨가 북한에 간다기에 여비를 좀 준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놓고 한국 정부는 내가 어마어마한 북한 공작원이라고 뒤집어씌운 겁니다. 한국 언론은 내게 확인 전화도 해보지 않고 안기부의 발표를 옮겨 대서특필하는 어이없는 일을 했고요.”


임동원ㆍ정세현ㆍ이재정과도 친분

삼천리철도 고문인 강종헌은 도상태와 관련된 행사에 자주 얼굴을 비췄다. 2009년 11월13일, 都 씨는 경기도 파주 도라산역에서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임동원, 정세현, 이재정으로부터 南北철도연결에 힘쓴 공로로 감사패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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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右) 전 통일부 장관으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도상태(右에서 세 번째). 이 전 장관 왼쪽이 강종헌
 (출처: 통일뉴스 캡처) 

 


강종헌은 이 자리에서 “분단의 현실에 대해서 또 한번 인식을 깊이하게 됐다”며 “우리가 해온 일이 결코 불필요한 일은 아니었고 보람있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통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발언출처: 2009년 11월14일字 <통일뉴스>)

<통일뉴스>는 都 씨와 이들 前職(전직) 통일부 장관 세 명과의 친분도 소개했다.
“2002년 3월20일 도상태 이사장 등 삼천리철도 관계자들은 이재정 당시 통일맞이 이사장의 소개로 통일부 장관실을 방문해 정세현 당시 통일부 장관에게 680만 엔을 전달한 인연이 있고, 이후 통일부 장관이 된 이재정 전 장관은 철도운행을 개시한 장본인이 됐다. 임동원 전 장관은 2002년 4월 대북특사로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남북 철도ㆍ도로 연결을 약속받은 당사자이다.”

都 씨는 2010년 5월26일, 임동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수여한 ‘한겨레통일문화상’도 수상했다. 강종헌은 이 시상식에도 참석했다. (출처: 2010년 5월27일字 <통일뉴스>)


<민단신문>이 강종헌 주장 반박하자 民團에 공개질의장 보내

都 씨는 2011년 9월25일, 일본에서 ‘투표2012’라는 시민단체를 발족시켰다. 그는 이 단체의 대표로 취임, 在日동포 출신들에게 被(피)선거권이 부여되도록 한국에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都 씨는 19代 총선을 앞둔 2012년 1월31일字 <통일뉴스>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작년(注: 2011년) 12월말 서울에 나가 한나라당, 민주당, 진보통합당(注: 통합진보당)을 찾아 이번 총선거의 비례대표로 재일동포 후보자를 세워줄 것을 요청해 왔다. 각 정당에는 복잡한 당내사정이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해외에 사는 국민의 선거권 부여는 피선거권이 함께 부여되어야만 합리성이 있을 것이다.”

2012년 4월5일, 통합진보당(통진당) 비례대표 후보로 내정된 강종헌은, 일본에서 실시된 19代 총선 在外국민 선거기간(3월28일~4월2일)동안 일본 內 10개 투표소에서 광범위한 不正(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사카 영사관에서는 투표를 하러 온 재외국민 유권자를 상대로 투표 관리요원이 ‘새누리(注: 새누리당)가 좋다. 1번으로 하시라’며 노골적으로 특정정당을 찍으라며 선거운동을 했다”고 밝혔다. 강종헌은 또 “나고야 영사관에서는 투표소 내에서 民團 관계자가 함께 간 일행에게 1번을 찍을 것을 종용했다”고도 했다.

이에 民團이 발행하는 <민단신문> 2012년 5월23일字는 ‘김일성 주의자가 국회에!’라는 기사에서 강종헌의 이 같은 주장을 반박했다. 신문은 강종헌의 부정선거 주장을 “모략”으로 규정, “民團 단원 뿐 아니라 재일동포들 사이에서도 분노가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강종헌이 反국가단체로 판시된 한민통과 利敵단체인 범민련 출신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신문은 “한통련은 통일이라는 미명 하에 재일동포들의 애국심을 악용해왔다”며 “이들의 활동 실태를 보면 ‘종북주의’ 정도가 아닌 對南 정치 공작 그 자체로 지탄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단신문>의 ‘강종헌 비판기사’가 보도되자, 도상태는 2012년 5월28일 民團 측에 日語로 된 공개질의장을 보냈다.


“강종헌 씨에게 강력하게 출마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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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태가 民團에 보낸 공개질의장 일부. '강종헌 씨에게 강력하게 출마를 요청했다'고 돼 있다[출처:
한기덕 삼천리철도 사무국장의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hangideok/posts/337967282943203)] 

 

 

都 씨는 질의장에서 강종헌이 통진당 후보로 출마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는 “지난 해(注: 2011년) 12월 한국 국회에 가서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등에게 해외동포를 후보로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었다”며 “그 결과 통합진보당만이 그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본인이 강종헌 씨에게 강력하게 출마를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강종헌의 통진당 비례대표 출마에 도상태가 개입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都 씨는 또 <민단신문>의 보도와 관련, 강종헌이 왜 김일성주의자인지, 김일성주의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 총 8개 질문에 답변해 줄 것을 民團 측에 요구했다.

강종헌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1975년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언도받고, 13년을 복역했던 인물이다.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통진당 비례대표 不正 경선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부터다. 소위 통진당 ‘당권파’ 측 핵심인 이석기, 김재연 등이 비례대표 의원직을 사퇴할 경우, 강종헌이 承繼(승계)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관위 前科(전과)기록에서 간첩단 사건 연루는 물론, 13년 복역 기록이 증발된 것으로 드러나 문제가 되기도 했다. 1982년 부산 美 문화원 방화사건을 주도했던 金鉉獎(김현장) 씨는 두 번의 공개편지를 통해 ‘강종헌은 북한 간첩이었다’고 폭로, 그에 대한 의혹은 더욱 증폭됐다.

이 무렵 강종헌이 어떤 인물인지 통진당 內에서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012년 5월17일字 <데일리안>은 金 씨의 공개편지로 촉발된 강종헌의 前歷과 통진당의 動向(동향)을 보도했다. 매체는 金 씨의 편지에 대한 강종헌의 반론을 듣고자 통진당 측에 전화를 했다고 한다. 이때 非당권파 측의 한 의원은 강종헌에 대해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인물”이라며 “알지도 못한다”고 밝혔다.

통진당의 한 관계자도 “재일교포 출신으로 재외동포에 대한 안배 차원으로 봤지, 그 분이 살아온 연혁으로 보지 않았다”며 “강 후보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재일동포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그 부분을 이슈화시키기 위해 등록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