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나쁘게 백제는 좋게 배우는 일본인' 오카자키 히사히코: <고대사를 읽으면 일본과 백제의 近親(근친)관계는 뭔가 이상할 정도로서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사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趙甲濟
盧泰敦 서울대 교수는 '삼국통일전쟁사'에서 亡國(망국)의 恨(한)을 품고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들이 일본의 正史인 日本書紀(일본서기)를 쓰는 데 직간접으로 관계하여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심었고, 이것이 지금의 韓日 갈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취지의 기술을 하고 있다. 필자는 수년 전부터 이와 비슷한 글을 써 왔다. 오늘의 韓日 갈등, 그 深層(심층)에는 신라와 백제의 갈등이 깔려 있다는 의미였다. 日本書紀는 8세기 초에 간행된 일본 최초 正史(일본 정권이 편찬한 공식 역사서)인데, 正史이므로 이 책에서 기술한 부정적인 新羅觀(신라관)은 그대로 일본에서 국가적, 국민적, 공식적 對신라관-對한국인관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이 한국의 자유통일을 지원한다는 의미는 이런 부정적 한반도觀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라와 백제의 近親증오가 韓日간의 증오로 변질
日本書紀(일본서기)와 이 책에 쓰여진 역사관을 배우고 자란 일본인들은 백제에 대하여는 좋은 감정을, 신라(한국)에 대하여 惡(악)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사 출신의 외교 평론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씨는 1970년대 한국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웃나라에서 생각한 것’이란 책을 썼는데, 한국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가장 균형 잡힌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올해 79세인 오카자키 히사히코씨는 지금도 자민당 정부에 전략적 助言(조언)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 책에서 노태돈 교수가 쓴 ‘呪術(주술)’과 비슷한 의미로서 ‘백제의 亡靈(망령)’이란 표현을 했다. <일본과 신라 사이의 안티파시(antipathy․뿌리 깊은 증오심) 속에는 신라와 백제의 近親(근친)증오적인 안티파시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다. 즉, 신라의 일본에 대한 경계심 속엔 백제에 대한 경계심이 섞여 있고, 일본의 신라에 대한 감정적 혐오 속에는 백제계 遺民(유민)의 영향이 짙은 일본 조정의 新羅(신라)혐오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고대사를 읽으면 일본과 백제의 近親(근친)관계는 뭔가 이상할 정도로서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사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戰前(전전)에 소학교 때 배운 상식도 그러하였다. 백제는 일본에 문자와 불교를 전해준 좋은 나라이고, 신라는 熊襲(웅습․규슈 남부의 미개 부족)의 오야붕(두목) 같은 나라로서, 일본이 공격하면 즉시 항복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나라로 묘사되어 있었다. 사람에 따라선 일본 조정의 書記(서기) 등은 모두 백제계 인물이므로, 역사 등도 백제에 유리하도록, 신라는 나쁜 것으로 기록하여, 일본인의 조선인 멸시는 이 백제계 사람들의 신라멸시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는 百濟記(백제기), 百濟新撰(백제신찬), 百濟本記(백제본기)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百濟의 古記(고기)를 여러 군데서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들도 文體(문체)를 보면 백제 사람들이 야마토 조정에 제출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란 說(설)이 최근에 유력해졌다>
신라에 대한 저주를 위해 쓰여진 日本書紀
신화와 사실이 뒤섞여 있고, 왜곡과 조작이 심한 日本書紀(720년 발간)를 읽어보면 반 이상이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와 관련된 기사이다. 이 책의 집필진은 가야 백제를 자신들의 편으로, 신라를 主敵(주적) 내지 屬國(속국)으로 간주하는 서술방법을 택하고 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이런 적대감과 경멸감이 한민족에 대한 감정으로 바뀌어 오늘날 韓日민족감정의 한 축이 형성되는 것이다. 일본 고대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일본 정권이 신라를 그토록 미워하게 되었는가이다. 日本書紀 欽明천황 23년7월 기사에는 任那(임나: 가야지방에 있었다는 일본의 기지)를 도와 신라를 치려고 파견되었다가 신라군에게 포로가 된 調吉士(귀화 백제인氏族)란 사람에 대한 내용이 있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억지로 바지를 벗겨 궁둥이를 내놓고 일본을 향하게 하고 큰 소리로 '일본 대장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는 그런데 큰 소리로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전과 같이 부르짖었다. 이 때문에 죽었다. 그 아들도 아비의 시신을 안고 죽었다. 그의 처 大葉子 또한 잡힌 몸이 되었다. 슬퍼하여 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城上에 서서 大葉子가 領巾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倭人(왜인)으로 귀화한 백제인이 倭(왜)를 위해 싸우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고문을 받으면서도 생명을 던져 倭(왜)에 충성을 바치고, 신라군의 포로가 된 그의 아내는 천황이 있는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충성의 깃발을 흔든다. 이런 글을 쓴 사람들이 조국을 신라에게 빼앗겨 돌아갈 고향이 없어진 백제系 일본인이었다면 이해가 간다. 서기 562년 신라가 大伽倻(대가야), 지금의 高靈(고령)을 점령하여 가야국이 최종적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欽明천황은 이런 한탄을 한다. 日本書紀에 적혀 있는 대목을 옮긴다. <신라는 서쪽 보잘 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皇家(황가)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天運(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가야 지방)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屍身(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 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欽明천황은 '그들(신라)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고 말했다. 大伽倻(대가야) 지역의 사람들을 倭의 천황이 '친척'이라고 부른다. 이는 고대 일본을 세운 主力 세력이 伽倻에서 규슈를 거쳐 近畿지방(나라, 교토)으로 건너간 伽倻人들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일본의 天皇家가 가야계통 사람들임을 추정하게 한다.
전쟁과 천재지변이 가장 많았던 신라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는 영국과 유럽대륙의 관계와 비슷하다. 오늘의 영국은 원주민에다가 독일에서 건너간 앵글로와 색슨족, 덴마크에서 건너간 바이킹족, 그리고 프랑스의 노르만디 지방에서 건너간 노르만족이 섞여서 만들어낸 나라이다. 일본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고구려족, 신라족, 가야족, 백제족이 각축하고 협력하여 만든 나라이다. 지금 경남지방에 있었던 가야족은 일찍부터 현해탄을 건너 北(북)규슈에 근거지를 만들어 한때는 韓日(한일) 양국에 걸친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신라 사람들은 일본 동해안의 시마네 지방으로 많이 건너갔다. 북규슈에서 힘을 기른 가야족은 세토나이카이라는 內海(내해)와 연안지방을 경유하여 나라, 교토 지방으로 진출, 여기에 일본 고대국가 야마토(大和)를 세운다. 이 가야세력은 天皇家(천황가)를 이루는데, 한반도의 本家(본가), 즉 가야 잔존세력을 계속 유지하려 하다가 보니 가야에 위협적인 신라에 대항하여 백제와 전략적 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의 지식인들이 우호국인 倭로 많이 몰려가 가야계 천황가를 떠받치는 관료집단을 형성하고 문자와 불교를 전하여 倭의 발전에 기여한다. 자연히 왜-가야-백제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신라를 압박한다.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여기에 대항하다가 강성해지자 고구려에서 독립, 6세기 중반 진흥왕 때는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 결전에서 가야+왜+백제 연합군을 혼자서 섬멸하여 100년 뒤의 삼국통일의 길을 연다. 한국 역사학계의 원로학자인 申炯植(신형식) 교수가 쓴 '新羅通史'(주류성 출판사)에는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 삼국시대의 전쟁통계이다.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신라로서 총174회이다. 다음이 고구려로서 145회, 백제는 141회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倭와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가장 많이 싸웠고 백제와는 다음으로 많이 싸웠다. 백제는 신라와 가장 자주 싸웠다. 신라는 지진, 가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에서도 삼국중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申교수가 三國史記를 분석하여 통계를 냈다. 삼국시대에 한정해보면 신라는 322회의 천재지변을 겪었다. 백제는 191회, 고구려는 153회였다. 申교수는 천재지변이 가장 많다는 것이 오히려 신라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삼국사기의 記事 내용을 분석해보면 신라는 정치에 관한 기사가 가장 많다고 한다. 정치란 권력승계를 평화적으로 하는 기술이고 지배층 내부 및 백성들과 지배층 사이의 단합을 도모하는 예술이다. 신라는 왕위 계승이 가장 안정적으로 된 나라이다. 지배층과 백성 사이의 단합도 삼국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군사적 승리 이전에 정치와 외교의 승리이다. 申교수는 신라가 수행한 수많은 전쟁의 긍정적 면을 이렇게 분석했다. <전쟁은 제도개혁이나 정치반성의 계기를 제공했고, 이것이 사회발전의 轉機(전기)를 가져왔다. 특히 신라는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장시켰으며, 對唐(대당)전쟁을 통해서 백제 고구려의 殘民(잔민)을 하나의 민족대열에 융합했다. 신라는 對外(대외)전쟁을 민족적 自覺(자각)과 융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전쟁과 천재지변은 국가가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이 난관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나라나 인간은 강건한 체질을 터득하게 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逆境(역경)을 극복한 결과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통일인데 남북통일이 요행수나 공짜로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 미신이다.
親신라 정권 天武천황
서기 645년 일본 천황가에 쿠데타가 발생한다. 주모자 中大兄(나카노오오에)皇子는 皇極(황극)천황을 폐위시키고 孝德(효덕)천황을 등극시킨 뒤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다. 이 政變(정변)에서 그를 결정적으로 도운 동지가 있었으니 백제 王族으로 추정되는 나카토미노카마타리(中臣鎌足)였다. 정권을 잡은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대화)의 改新(개신)이라 불리는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황족 및 지방의 귀족과 호족들이 갖고 있던 토지 및 백성들의 소유권을 천황의 公地(공지)와 公民(공민)으로 만들었다. 전국적으로 이들 땅과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 전국에 통용되는 획일적인 세금제도를 만들었다.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라는 年號(연호)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쓰게 하였다. 연호를 이때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천황의 지배력이 일본 全土(전토)에 처음으로 미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大化改新(대회개신)의 주도세력은 親百濟(친백제) 정책을 썼다. 서기 660년에 백제가 唐과 신라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자 당시의 천황(齊明)은 직접 사령관이 되어 백제 부흥운동파를 돕기 위한 구원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천황은 중도에 사망하는데 실권자 나카노오오에는 바톤을 이어받아 약3만 명의 병정과 수백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금강 하류의 서해연안으로 보냈다. 일본 역사에서 白村江의 해전으로 유명한 이 싸움에서 신라-당 연합군은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서기 663년의 일이다. 나카노오오에는 羅唐(나당) 연합군이 일본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수도를 오오츠(大津)로 옮기고, 대마도, 규슈 등 곳곳에 성을 쌓게 하고 스스로 천황(天智) 자리에 올랐다. 그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지식인, 관료, 귀족들을 우대하여 그들로부터 선진 문화 및 행정술을 배웠고 이를 국내 개혁에 활용했다. 개혁자 나카노오오에, 즉 天智천황은 서기 671년에 죽고 아들이 弘文(홍문)천황으로 등극한다. 이 등극에 불만을 품은 나카노오오에의 동생 오오아마(大海人)皇子(황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오오아마측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渡來人들이 붙었다. 신라의 문무왕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叛軍(반군)을 지원하였다는 설도 있다. 천황측에는 백제 도래인들이 섰다. 한반도 통일전쟁의 축도판적인 싸움이 벌어진 것인데 신라 도래인들이 밀던 반군이 이겨 홍문천황을 자살케 한 뒤 오오아마를 天武(천무)천황으로 추대했다. 親新羅 정권이 선 것이다. 이 반란을 ‘壬申의 亂’이라 부른다. 天武천황은 14년간 집권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2~3년에 한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신라의 발달된 제도와 문화를 배워왔다. 신라도 거의 매년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신라는 對唐(대당)결전을 벌이고 있을 때여서 일본이 唐과 손을 잡지 않도록 하는 데 외교의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 왜는 唐과 국교를 끊고 신라 하고만 교류함으로써 ‘우호적 중립’을 지켰다. 최근의 한일관계를 제외하면 이때 두 나라 사이가 가장 좋았다.
本家와 分家의 상호 존중
일본 역사학자 이노우에 기요시(井上 淸) 박사는 天武천황이 신라로부터 통일 국가 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열심히 배워 율령을 정비하고 고대 일본 국가를 완성했다고 평가하였다. 천무천황은 역사 편찬을 지시하였으나, 日本書紀가 완성된 것은 그가 죽은 뒤인 서기 720년이었다. 日本書紀를 편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백제 왕족 출신으로 나카노오오에의 쿠데타를 도왔던 나카토미노카마타리(中臣鎌足)의 아들 후지와라후히토(藤原不比等)였다. 후히토는 親신라 정권이던 천무천황 시절엔 숙청을 면하는 데 급급하였으나 그 후 문무천황 옹립에 성공하여 政界(정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가 편찬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日本書紀가 신라를 매도하는 편향적인 기술방향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백제 왕족의 후손이란 점, 親신라적인 천무천황 시절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런 것이다. 후히토의 아버지 中臣鎌足은 죽기 직전 天智(천지)천황으로부터 후지와라(藤原)란 姓(성)을 받아 후지와라노카마타리(藤原鎌足)가 된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백제계 후지와라 집안이 일본의 정권을 장악, 反신라 정책과 反신라적 시각을 일본인의 역사와 유전자 속에 심었던 것이다. 이런 反신라 감정은 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면서도 傳承(전승)되어 反韓(반한)감정으로 고착된 것이다. 新羅(신라)에 패배한 백제와 倭人(왜인)이 흘린 피와 원한의 呪術(주술)에서 벗어나려면, 오늘의 일본인들은 古代史(고대사)의 진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고,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이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지원하는 것은, 이 주술에 걸린 일본인들이 스스로 이 주술을 깨는 일이다. 일본 보수층을 대표하는 앵커우먼 출신의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씨는 '세상은 의외로 과학적이다'는 책에서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혈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민족은 일본인, 한국인, 몽골인이다. 한국인과 몽골인이 本家이고 일본인은 分家인 셈이다. 일본인은 本家에 감사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인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땅에까지 와서 좋은 나라를 만든 조상들의 진취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本家인 한국인들도 分家의 이런 업적을 평가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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