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386운동권의 1호 얼굴마담이었다. 386세대는 90년대에 나온 말로 80년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개인 컴퓨터 386에서 따온 말이다. 60년대생이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386컴퓨터를 사용한 세대가 90년대에 30대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생긴 말이다. 이들이 나이가 40대에 접어들면서 486이란 말도 쓰는데, 그러면 곧 586, 686, 786이란 개그 용어도 생길 것이다. 하나의 상징이므로 그들의 나이와 관계없이 386이라고 쓰는 게 마땅하다.
386운동권은 내 나름대로의 분류에 따르면, 운동권 4세대에 속한다. 이들은 그 이전 운동권 2세대나 3세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렇다고 시대에 앞서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50년대의 할아버지 세대로 뒷걸음쳤다. 운동권 1세대 곧 박헌영 세대로, 민족반역자 김일성에 의해 6.25 패전의 죄를 뒤집어쓰고 전원 숙청된 박헌영을 비롯한 운동권 1세대로 뒷걸음쳤다. 그들의 맹신이나 광신과는 반대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시대착오적인 무리가 되어 버렸다. 역설적으로 세계사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시장경제로, 자본주의로 수렴되었다. 386운동권이 그들의 멘토인 운동권 2세대 3세대까지 포함하여 한국 사회 전체를 매도하면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던 때부터, 세계사는 그들의 바람과 확신과는 정반대로 급변했다. 그들의 이상향 공산권이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몰락하며 20세기의 최대 기적 한국 따라 배우기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경을 거쳐 그다니스크까지 기러기처럼 줄을 선 것이다.
몰락한 옛 공산권과 몰락할 뻔했던 중국은 신제국주의와 신봉건주의라며, 세상 모든 악의 원천이라며 지구에서 말살하려고 광분했던 자본주의를 개혁개방의 표준으로, 진보의 표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386세대는 마르크스주의 또는 김일성주의를 개혁개방으로, 진보로 삼고 사상 전쟁과 용어(用語) 전투에 들어가서, 한국의 지리멸렬 정통우파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 그들의 상대는 사상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용어 전투가 벌어진 줄도 모르고 미국의 대 소련 냉전 압승을 한국의 대 북한 압승으로 착각하고 날마다 샴페인을 터뜨리던 중이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방송 3사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동아에도 새누리당에도 386운동권이 곳곳에 포진하여 까칠한 소리를 내뱉으며 곳곳에서 아름다운 말을 골라하면서 한반도기를 흔들고 있었다.
한국에선 21세기와 더불어 진보가 민주고 민주가 사회주의고 사회주의가 김일성주의로 자리 잡았지만, 아직 사회주의와 김일성주의란 말만 쓰지 않을 따름이다. 그것은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란 당명에서 보면 알 수 있다. 진보란 말도 노무현 정부에서 비로소 긍정적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으니까, 운동권 3세대도 386운동권에 접수되어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를 표준으로 삼은 지 오래되었지만, 운동권 3세대 이해찬의 말을 빌면 정치인은 대중과 함께해야 하므로, 사회주의나 김일성주의를 아직 입에 담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언제나 평등, 분배, 복지, 재벌해체, 서울대 해체 곧 사회주의에 맞춰져 있다. 민족, 자주, 금강산 관광산업 재개, 인도적 지원, 천안함 폭침 음모설, 김현희 가짜설, 탈북자 변절자 등 태양신 김일성이 기뻐하는 쪽으로 맞춰져 있다. 닥치고 김일성 왕조 편들기로 일관되어 있다. 한편 386운동권에 속하지 않고 개인적 출세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386세대는 386운동권에 일종의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 현재로선 안철수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386운동권에게 운동권 2세대인 김대중은 비판적 지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김대중은 그들보다 서열이 높았다. 게다가 열 배 스무 배 노련했다. 6.15공동선언을 김정일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김정일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6.15제1차연평해전 패전에 대한 6.29제2차연평해전의 보복적 승리를 그에게 헌납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승리를 대한민국의 패배로 바꿔준 것이다. 그때부터 386운동권은 김대중 선생님 앞에서 스스로 모든 관절을 꺾었다. 문제는 김대중 다음이었다. 수사(修辭)를 걷어치우고 386운동권의 용어를 때로 직설적으로 쓰면서 그들의 지침을 그대로 따라할 얼굴마담을 찾아야 했다. 운동권 3세대에선 김대중 같은 카리스마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도장을 받은 자가 정신적 386세대 노무현이었다. 권력의지와 명예욕은 누구 못지않았지만, 조직도 사상도 없었던 한국의 돈키호테는 안성맞춤이었다. 김대중과 김정일도 흔쾌히 밀어 주었다. 대성공이었다. 봉하도령은 강화도령처럼 말을 잘 들었다. 386운동권의 속엣말을 잘도 했다. 그러나 반골기질이 강하고 주산처럼 계산이 밝고 서울법대 출신처럼 머리가 좋았던 봉하도령은 때로 얼굴마담 역할이 지겹다고 떼를 썼다. “대통령 짓 못해 먹겠다!” 그는 권력을 이용하여 푼돈을 챙기다가 결국 들켜서 마침내 국민의 눈 밖에만이 아니라 386의 눈 밖에도 났다. 다행히 그는 일찍 죽어 386운동권에 의해 새 영웅으로 상징 조작되었다.
노무현에 이은 2호 얼굴마담을 만들지 못해 386운동권은 ‘2002년이여, 다시 한 번’에 일차 실패했다. 5년 후 올해 그들은 2호 얼굴마담을 내세우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항상 복수의 인물을 키우는데, 현재로선 안철수와 문재인, 김두관 등으로 좁혀지고 있다. (손학규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아 한 번 변절한 적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다.) 노무현 이상으로 조직도 사상도 없다는 면에서, 게다가 386운동권이 음으로 양으로 인기와 조직을 관리해 준 면에서 안철수가 유력하지만, 아직은 누가 될지 모른다. 아마 이들 세 사람만이 아니라 386운동권 자신도 모를 것이다. 대선 예비고사에서는 박원순이 서울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대선 본고사가 예비고사와 같다면, 안철수를 바람잡이로 하여 문재인이나 김두관을 2호 얼굴마담으로 발탁할 것이지만, 모의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거의 놓치지 않은 상대가 있어 저들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하여간 이들 세 사람은 연막을 피우든 교언영색하든 돌직구를 던지든, 자신들의 핵심 지지층이 386운동권임을 직관적으로 알기 때문에, 이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알기 때문에 그들의 뜻에 벗어나는 말이나 행동은 승리하든 패배하든 허용 범위를 감히 넘을 수가 없다. 그 순간 바로 제거된다. 변절자로 영원히 낙인찍힌다. 그러나 많은 국민은 이들 중에 누구 하나로 결정되면, 386운동권의 괴벨스 못지않은 선전선동에 현혹되고, 386운동권의 모택동 못지않은 신출귀몰 선거 게릴라에 박수하며 1호 얼굴마담에 그리했듯이 스스로 누구를 지지하는 줄도 모르고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속출할 것이다. 어쩌면 몇 가지 돌발 변수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면 순발력이 뛰어난 386운동권이 2호 얼굴마담을 내세우고 대선에서 성공할지도 모른다.
386운동권에는 청천벼락으로 김정일이 대망의 2012년을 맞이하지 못하고 김일성 곁으로 가 버렸다. 김일성의 손자 김정은에게 힘을 실어 주려면 2012년 대선에서 그들의 얼굴마담이 꼭 승리해야 하는데, 국내외 사정이 만만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다급하기 그지없다.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지난 총선 때처럼 종북주의자들이 정체를 드러내는 자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것이 386운동권에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게 유리한 것도 많다.
첫째는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며 눈을 치뜨던 이명박 정부의 자멸이다. 새누리당이 아무리 이명박 정부와 선을 그으려고 하더라도 정권 심판론은 힘을 얻을 것이다.
둘째는 새누리당 내의 386운동권들이다. 리모컨으로 조절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사건건 개혁과 소통을 내세우며 386운동권의 사상을 대폭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재벌은 이미 민통당이나 통진당 못지않게 새누리당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이중 포석으로 설령 대선에서 지더라도 이명박 정부가 취임하자마자 그 높은 코에 코뚜레를 꿰었듯이 새 정부에게 경제민주화와 6.15공동선언의 칼을 씌울 수 있다. 성춘향처럼 옥중에서 칼을 쓰고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할 수 있다. 소설과는 달리 현실에선 이몽룡이 비명횡사했으니까, 정통우파는 씨가 말랐으니까, 구세주는 올 수가 없다. 사랑가 대신 귀곡성만 울려 퍼질 것이다.
셋째는 일본이다. 일본은 노골적으로 군사대국화의 길로 가고 있다. 반일 감정을 부추기기에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이번 대선에서 써 먹지 못하더라도 대선 후, 패배하게 되면 크게 써 먹을 수 있는 꽃놀이패다.
넷째는 중국이다. 중국식 개혁개방을 종용하더라도, 중국은 미국과 한국의 동맹을 깨뜨릴 최고의 386운동권 원군이다. 한국의 대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중국은 386운동권의 가장 든든한 방패다. 어리광 피우며 엉덩이에 난 뿔을 마음껏 비빌 언덕이다. 최후의 승리를 보장해 줄 그들의 구세주, 당나라 군대다. (2012.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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