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꽉 찬 산악국가, 농업 관광 산업 은행 등 유럽기행(4)/스위스 편 조약돌(회원) 유럽 여행기(4편. 스위스 1.)
스위스 영세 중립국 스위스는, 서쪽으로는 불란서와, 위쪽으로는 독일과, 동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및 리히텐슈타인과, 남쪽으로는 이태리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바다와는 접하지 않는 면적이 41,285 km²(남한 면적의 약 40%) 정도 되는 아담한 산악 국가로 인구는 770만명(2012년 추산)인 나라로 수도는 베른이다. 스위스는 국민들 의사에 따라서 유럽 연합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통화도 유로화가 아니라 과거부터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스위스 프랑(1 프랑은 1,240원 정도)을 고수하고 있으며, 1인당 국민소득(GNP)은 US $ 51,000의 부자 나라이다. 스위스 국민의 75%는 독일어, 18% 정도가 불어, 6%는 이태리어, 그외에 토착어(래트로망스)를 쓰는 국민은 1% 내외인 다 언어 국가이다. 이 나라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게 된 데는 독어권인 독일, 오스트리아, 불란서, 이태리와 현재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거 이 지역을 지배했던 민족의 유산이자 이웃 나라와의 교역, 왕래와 무관치 않다. 모든 국민들이 4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국민들은 최소한 2-3가지 언어를 구사하며 영어 또한 기본적으로 구사할 수 있기 때문 아마 전 세계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스위스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다양한 언어 사용과 영세중립국이라는 입지적 조건 때문에 이 나라에는 국제 적십자사, 국제노동기구(ILO), 세계보건기구(WHO), 유네스코, 국제 올림픽위원회(IOC), 국제축구연맹(FIFA) 등 수십 개의 국제 기구가 제네바, 로잔, 베른, 바젤, 취리히 등 이 나라 여러 도시에 산재해 있으며 당연히 국제기구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는 스위스 사람들의 비중이 대단히 높을 수 밖에 없다. 스위스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국가 슬로건(표어)을 채택하여 사용하는 나라다. “ 전체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전체를 위해(라틴어 Unus pro omnibus, omnes pro uno!) ” 라는 슬로건인데 우리들의 귀에도 익은 말이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도, 자신의 대 국민 연설에서 이 문구를 인용했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북한은, 저들의 사회주의 헌법 63조에 위 슬로건의 앞 뒤 문장을 뒤집어서,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 라는 조항으로 채택 함으로서 이 조문을 근거로 인민들의 수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또한 스위스는, 스위스의 국기를 바탕으로 한 방패 모양의 디자인으로, 빨간색 방패 안에 하얀색 십자가 그려져 있는 형태의 국장(國章)을 제정하여, 그들의 차량 번호판, 화폐, 스위스 제품(예: 스위스 육군 나이프)에 사용하고 있다. 1. 스위스의 용병 용병이란, 전쟁에서 정규군이 부족할 때 대신 돈을 받고 싸워 주는 군사를 말한다. 중세와 근대 시기, 척박하고 황량한 땅에서 식량을 구하기도 어려웠던 스위스인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방법은 용병이 되는 것뿐이었다. 당시 용병이라고 하면 스위스 용병을 떠올릴 만큼, 유럽 전역을 통틀어 스위스 군사의 용맹함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여러 나라의 전쟁터에서 활약한 스위스 용병이 가지고 돌아온 상당한 액수의 외화는 스위스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고, 이후 면직물이나 시계 등의 제조업으로 스위스 경제는 발전하기 시작한다. 스위스 용병의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서 로마 교황청의 경비를 담당하는 바티칸 근위대는, 이태리 출신이 아니라 전부가 스위스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다. 2. 스위스 은행 예금주가 누구인지 하느님도 모른다는 「검은 돈의 은신처」라고 일컫는 「스위스 은행」은 특정 은행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스위스 국내 모든 은행을 일컫는 말이다. 스위스 3大 은행은, 「스위스 유니온 뱅크(SUB)」,「스위스 은행(SBC)」,「 크레딧 스위스(CS)」인데 「스위스 유니온 뱅크(SUB)」와 「스위스 은행(SBC)」은 1998년 합병, 프라이빗 뱅킹(개인 고객관리 업무) 부문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스위스 은행은 400여 개에 달하며, 각 나라의 기관이나 개인이 예치한 2조5천억 달러에 근접하는 자금을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상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는 돈이 출처가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최소 10만 스위스 프랑 이상의 고액 예금주들을 위한 번호계좌를 말한다. 예금주의 이름 없이 숫자와 문자가 조합된 계좌번호(예를 들어, 571 260 SQ8)만으로 이루어진 계좌다. 입·출금, 거래명세서 작성 등 모든 거래에 이 계좌번호를 이름 대신 사용, 은행원들도 예금주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은행원이 전표를 분실했을 경우에도 예금주가 드러나는 일이 없다. 실수로 번호를 잘못 기재하고 송금하면 남의 계좌로 들어가 영영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생기는 비밀계좌는 당좌 계정으로, 유동성 예금이기 때문에 이자가 붙지 않는다. 1980년 이전까지는 예금자가 보관료를 무는 형태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스위스 은행 계좌」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스위스로 갈 필요는 없다. 최소한 미화 2천만 달라 이상(금액은 은행에 따라 다르다) 예금을 하려고 한다면 스위스 은행 직원이 직접 예금자가 사는 곳으로 찾아와서 계좌를 개설해 준다. 최근에는 법이 바뀌어서 비밀번호계좌 거래를 트려면 반드시 본인이 신원증명을 하고, 왜 비밀 번호 계좌를 만드는지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예금주가 갑자기 사망할 경우에는 자녀 등 피상속권자가 비밀번호를 모르더라도 「스위스 OO은행에 예금이 있다」는 부모의 유서 등 증명 가능 문건만 있으면 인출이 가능하다. 각국에 혁명이 일어나고 독재자가 축출될 때마다 스위스 은행이 거론되는 데 북한의 김정일도 스위스 은행에 상당 액수의 금액을 예금해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검은 돈의 천국」이라는 국제적인 비난이 거세어지면서 스위스의 철저한 고객 신분보장 정책도 변화를 겪었다. 1990년 7월, 범죄행위를 통해 번 돈임을 알면서 예금으로 받아들인 자는 최고 징역 5년 및 100만 스위스 프랑의 벌금에 처한다는 돈세탁 규제법안이 나왔으며, 1991년 10월에는 대리인의 계좌개설을 허용하는 「B형 계좌제」 를 폐지, 형식상으로는 완전한 실명제를 마련하였다. 1993년에는 법원이 범죄행위로 판정하면 예금자의 신원과 자금의 성격을 공개하도록 하였다. 1996년에는 사기, 마약거래 등의 범죄와 관련된 경우 은행 거래비밀을 공개 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제정되었다. 1998년 4월1일 돈세탁 방지법이 제정되어 돈세탁과 관계가 있다는 근거가 있는 자금에 대해서는 은행들이 해당 금융거래 내용을 당국에 반드시 신고하고, 의심 가는 돈의 입출금을 5일 동안 즉각적으로 동결하도록 규정하였다. 본인이 아니면 어느 나라 정부나 개인이 요청하더라도 지급을 거부하여 철옹성이라고 불리던 스위스 은행들도 최근에는 합법적인 자금이 아님이 명백한 돈이나 범죄에 관련된 자금을 해당국 정부에 반환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1997년 9월에는 아프리카 말리 공화국의 독재자 트라오레가 스위스 비밀계좌에 예치한 390만 달러를 말리 공화국에 반환했고1998년 7월에는 마르코스 前 필리핀 대통령의 예치액 5억7000만 달러를 필리핀 정부에 반환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중에도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에 검은 돈이 예치되어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으나 공식적으로 아직까지 확인된 바는 없다. 3. 직접 민주주의 국가 전 세계 국가 중에서는 드물게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해서는 국민투표로 민의를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채택한 연방제 국가인 스위스는 국민 대다수가 기독교(천주교 41.8%, 개신교 35.3 %)를 신봉하며 그 밖에 4.3%의 이슬람 신자들도 있다. 4. 스위스 산업 스위스 인 중에는 일할 의욕만 있다면 일자리가 없어서 생기는 실업은 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산업들이 국가 생산성 증대에 기여하고 있다. 스위스는 농업, 공업, 금융 업 서비스 업, 관광업 등이 골고루 발달되어 국가의 부 창출 및 국민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산악 국가로 경작지가 전 국토의 1/4미만이며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 또한 전 국민의 2 % 정도로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지만, 농업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량은 식량 자급 자족율이 60%에 이를 정도로 1인당 농업 생산성은 대단히 높다. 농업이 스위스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에 불과하지만, 국토를 농토로 이용하며, 자연환경을 보호·관리하고, 식량난에 대비하여 자급 자족율을 높이고 대도시 인구집중 현상을 방지하려는 목적 하에 농업은 크게 중시되고 있다. 스위스 정부는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70% 이상에게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교육, 상담, 조언, 토지 개량, 가격 및 판매 보장, 사회보장 조치 등으로 농민을 보호하고 농업을 장려하고 있다. 친환경적 농업정책에 힘쓰고 있으며, 축산 낙농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치즈, 유아식품, 초콜릿 제조업 등이 발달했다. 스위스는 석유파동 이후 1973년 에너지 소비량의 80%를 차지하던 석유 비중을 줄이고자 대폭적인 에너지 대체 정책(수력, 원자력, 가스, 태양, 바람, 나무, 석탄, 쓰레기 등을 사용)을 추진한 결과, 현재 석유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기적에 가까운5% 미만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수력은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497개의 수력발전소가 국내 전력 생산의 55%를, 5개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40%를 담당하고 있다. 1990년 국민투표에 따라 환경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원자력 발전소의 증설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원자력 발전소만 유지하고 있다. 기계, 전기, 금속산업이 크게 발달하여 동 산업 생산품이 스위스 전체 수출의 45%를 차지하고 있으며, 생산품목으로는 거대한 기차에서부터 섬유기계, 금속가공기계, 발전 및 선박용 터빈, 광학기기, 정밀측정기, 환경보전설비, 발전설비, 의료기기 등으로 다양하고 전 세계적으로 스위스 제품의 지명도 또한 대단히 높다. 스위스에서 최초로 제조된 터빈 발전기(1898), 전기를 이용한 톱니 궤도식 철도(1890), 펌프 터빈(1930), 가스터빈 발전소(1978) 등은 세계 공업기술 발달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한 때 전 세계 명품 시계의 대명사로 인정받던 스위스 제 시계는, 최근에 들어서 전자 시계의 보편화로 20세기 때보다는 못 하지만 여전히 고급 시계 시장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전 세계를 석권하고 있으며 한 해 스위스에서 수출되는 시계만으로도 미화 120 억 달라를 벌어들이고 있다. 한국인들은 죽을 때 유산으로 부동산을 남기는 반면, 스위스인들은 차던 시계를 남기고 간다고 했다. 몇 대조 할아버지의 시계를 그 아들이, 그 후에는 손자, 증손자가 하는 식으로 대를 물리며 내려오는 시계가 스위스 시계라고 했다. 그 외에도 정밀 광학 기기와 더불어 전 세계 모든 국가 국민들 가정에 거의 한 자루 씩은 소장하고 있다는 스위스 국기 문장이 새겨진 군용 휴대용 칼도 수출 효자 상품이다. 스위스의 화학산업은 섬유산업에 필요한 염색재료 개발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에는 주로 특수화학 제품 및 의약품을 생산, 수출하고 있다 의약품 및 화학 분야는 세계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많은 화학 및 제약 회사들이 독일 국경에 위치한 바젤(Basel) 지역에 소재했다. 세계 2위의 제약업체 노바티스(Novartis) 사는 의약 및 영양제, 농화학 제품 및 살충제 생산 부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이다. 스위스는 아름다운 알프스와 수려한 호수, 다채로운 위락시설, 유럽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등으로 일찍부터 관광산업이 발달해 왔으며, 국민소득의 주요 수입원 역할을 하고있다. 여름·겨울 휴양지, 온천 휴양지, 국제대회 개최지 등에는 호텔, 콘도, 민박 등이 즐비하며, 지역에 따라서는 주민의 70%가 관광업에 종사하는 곳도 있다. 2010년도 스위스의 관광 수입액은 미화 170억 달라로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에서 약 4.0%를 차지했다. 스위스가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높은 저축성, 사회적·경제적 안정, 정치적 중립, 은행 비밀주의 등을 들 수 있다. 은행비밀주의 전통은 17세기부터 시작되었으며, 1930년대 독일 나치정권이 스위스 은행의 독일 고객, 특히 유태인 고객 정보를 공개하도록 스위스 측에 압력을 가해오자 이들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1934년 은행 비밀주의 원칙을 입법화한 데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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